4화
‹ ›그날 밤 나는 다혜와 지훈에게 최소한의 것만 말했다.
도현이 선화왕국 왕세자라는 사실은 뺐다.
그저 "알파고, 관계를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다혜의 눈이 커졌다.
"뭐? 알파? 그런 사람을 어디서 만난 거야?"
"그냥, 우연히."
"우연히로 어떻게 알파랑 오메가가 만나.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다혜는 화를 냈다가, 걱정했다가, 결국 조용히 물었다.
"너 억지로 그런 거 아니지?"
"아니야."
"확실해?"
"확실해."
다혜는 한숨을 쉬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알았지?"
"알았어."
지훈은 그날 이후로 별말이 없었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유독 조용했다.
다만 가끔 나를 유심히 살피는 눈빛이 늘었다.
밥을 먹을 때도, 강의실에서 옆자리에 앉을 때도, 지훈의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한 번은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뭐라고 물어보겠어. 나도 제대로 설명 못 하는데.'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도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받았는데.
"다혜랑 지훈, 더 이상 만나지 마."
"뭐?"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위험해. 네 정체가 새어나가면 걷잡을 수 없어."
"걔들이 무슨 정체를 새게 해. 걔들은 내 친구야."
"그래도."
도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알파의 명령조가 스며 있는 말투였다.
순간 몸 어딘가가 그 말에 반응하려는 걸 느꼈다.
등줄기가 저릿했다.
오메가는 알파의 강한 어조에 본능적으로 복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배웠던 지식이 머릿속에서 경고처럼 울렸다.
나는 그 감각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손에 든 휴대폰을 꽉 쥐었다.
"싫어."
나는 일부러 더 세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어금니를 물었다.
"걔들은 내 친구고, 내가 정할 문제야."
전화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이 몇 초쯤 이어졌다.
"……도현아."
"알았어."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눌러 담은 감정이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한참 바라봤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대체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는 거야.'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이틀 뒤, 나는 도현의 방에서 이상한 편지를 발견했다.
도현이 화장실에 간 사이, 책상 위에 놓인 편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선화왕국 왕실 문양이 찍힌 편지였다.
봉투 위쪽에 새겨진 문양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도현이 가끔 걸치던 목걸이에서 본 것과 같은 무늬였다.
필체는 낯설었다.
날카롭고 격식 있는 글씨체였다.
내용을 슬쩍 본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서준이라는 아이는 이미 다른 알파와 접촉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중하게 판단하시길.]
서명은 없었다.
다만 왕실 인장이 찍혀 있었다.
붉은 밀랍 위에 눌린 도장 자국이 선명했다.
'다른 알파와 접촉?'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머릿속을 빠르게 훑었다.
만난 알파라고 해봐야 도현뿐이었다.
'이거 누가 보낸 거야.'
손가락이 편지 끝을 만지작거렸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서둘러 편지를 내려놓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도현이 나오며 내 표정을 살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나는 애써 웃었지만, 도현의 눈빛은 이미 책상 위 편지로 향해 있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표정이 바뀌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거 봤어?"
"……어. 그런데 그게 뭐야?"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를 낚아채 서랍에 넣고 잠가버렸다.
손놀림이 거칠었다.
서랍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현아, 저거 누가 보낸 거야?"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나에 대한 얘긴데."
도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그를 더 몰아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거야.'
그날 밤 도현의 방을 나오며, 나는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 날, 나는 강의를 듣던 중 휴대폰이 울리는 걸 느꼈다.
[지금 강의실 앞으로 나와.]
도현이었다.
메시지 아래 시간을 보니 강의가 끝나기까지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이 시간에 뭐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조교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챙기는 손이 어색했다.
강의실 문을 열자, 복도에 도현이 서 있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의 여유로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뭐야, 갑자기."
"따라와."
손목을 잡은 힘이 평소보다 강했다.
살짝 아플 정도였다.
복도를 지나던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들이 무서웠다.
"도현아, 사람들이 보잖아."
도현은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 건물 뒤편,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발소리가 계단에 울렸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벽에 등이 닿자, 도현이 내 어깨를 짚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 편지 내용, 진짜인지 아닌지 나도 몰라."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근데 만약 진짜면 어떡할 거야?"
"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다른 알파랑……"
"그런 적 없어! 도현아, 너 지금 그걸 믿는 거야?"
목소리가 커졌다.
억울함과 당혹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도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노도, 불안도 아닌, 뭔가 억눌린 감정이 그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약한 열기가 느껴졌다.
어깨를 짚은 손바닥에서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알파의 페로몬이 통제를 벗어나기 직전의 신호였다.
공기 중에 옅게 퍼지는 숲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믿어, 안 믿어야지."
그가 겨우 말했다.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근데 그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가 문제야."
"그게 무슨 뜻이야?"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숲 같은 향이 짙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가 귀 옆에서 들렸다.
"당분간,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그 말이 애원처럼 들렸다.
왕세자답지 않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함만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