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 인영은 몇 초간 이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나무 뒤에서 그 뒷모습을 지켜봤고, 옷차림새와 걸음걸이를 살펴본 결과 적어도 무장한 전투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걸음걸이가 지나치게 여유롭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이런 위험지대에서 저렇게 태평하게 걸을 수 있다는 건 저 인영이 이곳 지리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나만큼이나 무모한 인간이라는 뜻이겠지. '일단은 위협이 아니라고 봐야 하나.' 나는 그렇게 판단하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는 않았다. 이 산속에서 첫 번째로 세워야 할 원칙은 명확했다. 확신이 없으면 은신을 우선하고,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는 것. 전생에 수백 번 죽어본 경험이 하나 가르쳐준 게 있다면, 호기심은 언제나 목숨보다 비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인영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더 기다렸다.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주변의 벌레 울음소리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그러고서야 몸을 일으켰고, 시스템에게 낮게 물었다.
"안전지대까지 얼마나 남았지?"
"직전 경로 기준으로 약 이백 미터 남았으나, 방금 이동한 지형 변화로 경로 재계산이 필요합니다."
"경로 재계산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지만, 대답 대신 발밑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지는 게 먼저였다. 처음엔 미세한 떨림이었는데, 마치 저 멀리서 거대한 짐승이 걸어오는 듯한 그런 진동이었다. 곧 그 떨림은 점점 강해지며 발밑의 흙이 서서히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설마 지진인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몸을 채 옮기기도 전에 그 순간 발밑이 통째로 꺼져 내리며 나는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낙하하는 동안 나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뭔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 닿는 건 무너져 내리는 흙덩이뿐이었다. 시야가 흙먼지로 뒤덮여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었고, 귓가에는 시스템의 무언가 경고성 발언이 파편처럼 들려왔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등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숨이 턱 막혔다가 곧 단단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나는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는데, 갈비뼈 부근에서 다시 둔한 통증이 치솟았지만 뼈가 부러진 정도는 아닌 듯했다. 손목을 몇 번 돌려보고, 발목도 마찬가지로 확인해봤다. 다행히 골절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 몸뚱이는 대체 얼마나 더 굴려야 하는 건가.' 나는 그런 자조를 흘리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잃었다.
나는 지하로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지하 공간의 천장 일부가 붕괴되어 그 안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벽면 전체가 회백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표면에는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문양들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양들은 마치 회로 기판의 배선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내가 뚫고 들어온 구멍 위로 흐릿한 하늘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 빛만으로는 이 넓은 공간을 다 비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건 완전히 고대 유적이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천장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빛 외에는 다른 광원이 없었지만 벽면의 문양들이 스스로 발광하며 공간 전체에 옅은 청색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보다는 조금 거친 질감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밟지 않은 듯 얇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시스템의 음성이 곧바로 반응했다.
"미확인 구역입니다. 본 시스템의 지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지형으로 확인됩니다."
"등록도 안 된 구역이라니, 이건 완전히 숨겨진 던전이군." 나는 흥미를 감추지 못하며 벽면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 안전지대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런 자세로 계속 살아왔으니 지금까지 몸이 이렇게 축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문양을 손끝으로 스치는 순간 그 부분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빛의 세기가 잠깐 강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거 반응형 구조물인가.' 나는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공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벽을 따라 걸으며 문양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었는데, 어떤 것은 원형으로, 어떤 것은 날카로운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간격이 좁아질수록 빛도 점점 밝아지는 듯했다. 그렇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그 안쪽 깊은 곳에서 뭔가 은은하게 붉은 빛을 뿜어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물체는 낮은 제단 위에 놓여 있었는데, 제단 자체는 손상되어 절반쯤 무너진 상태였지만 그 위에 놓인 물체는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변 바닥에는 무너진 석재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들 위에도 옅게 붉은빛이 반사되어 마치 핏자국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부러진 활의 팔 부분처럼 보이는 파편이었는데, 표면에는 내가 각성 공간에서 봤던 그 미완성 활의 문양과 완전히 동일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무늬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무언가가 스쳤다. '이게 설마 그 파편인가.'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손을 뻗었고, 시스템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경고. 해당 물체는 예장 '적염궁장'의 회수 대상 파편으로 확인됩니다. 다만 주변 마력 반응이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접촉 전 신중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비정상적으로 높다니, 위험하다는 소린가?" 나는 손을 멈추고 되물었다.
"확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정도 마력 밀도는 일반적인 유적 잔재에서 관측되는 수치를 크게 초과합니다."
"수치를 초과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는 말해줄 수 있나?" 나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로 물었다.
"동일 등급 유적 평균치의 약 십칠 배에 해당합니다. 정상적인 범주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십칠 배라는 말을 듣고서도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쯤 되면 위험하다는 말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위험이 클수록 보상도 크다는 게 이 바닥의 불변의 법칙이었으니까. 나는 그 경고를 듣고서도 손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이 파편이 예장을 완성시켜줄 열쇠라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도 목숨 걸고 온 거 아닌가.'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손끝을 파편에 가져다 댔는데, 그 순간 파편 전체가 강렬한 붉은 빛을 뿜어내며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고, 벽면의 푸른 문양들이 일제히 점멸하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이 뛰듯 규칙적으로 켜지고 꺼지는 그 빛이 온 공간을 붉고 푸른 색으로 번갈아 물들였다. 그리고 그 진동과 함께, 공간 저 안쪽 깊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천천히 눈을 뜨는 듯한, 낮고 무거운 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