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러니까, 내가 대회용으로 짜 넣은 캐릭터 데이터가 지금 이 몸의 정체라는 거로군?" 나는 애써 침착한 척 되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그 무감정한 음성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정확합니다. 귀하가 설계한 캐릭터 '적염궁수'의 인격 프레임과 스킬 트리, 스탯 구조가 이 육체에 이식되었습니다. 다만 완전한 이식은 아니며, 현재 진행률은 약 십칠 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십칠 퍼센트?"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그럼 나머지 팔십삼 퍼센트는 대체 뭐로 채운다는 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굴리는 사이, 시스템은 마치 내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귀하가 직접 완성해야 할 예장, '적염궁장'의 회수와 마력 숙련도 상승으로 채워집니다. 예장이 완성되기 전까지 귀하의 전투력은 표준 초심자 수준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손목의 붉은 문양을 다시 내려다봤다. '고작 초심자 수준이라니, 이 산속에서 그럼 나는 방금 갓 튜토리얼을 뗀 캐릭터란 소린가.'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웃음 뒤에 남는 씁쓸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임을 만들 때는 이런 초기 구간을 '적당히 지루하게' 설계해서 유저가 성장의 재미를 느끼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지금은 그 지루함이 곧 생존 확률과 직결된다는 게 우습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물었다.
"좋아, 그럼 지금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산이 하늘에 걸려 있는 걸 보고도 태연할 만큼 배짱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말이야."
"현재 위치는 천공마수산맥 외곽 삼림지대입니다. 이 산맥은 지표면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부유하는 특수 지형으로, 내부에는 다양한 등급의 마수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산맥 전체는 총 다섯 개의 층위로 구분되며, 귀하가 있는 곳은 최하위 층위에 해당합니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게임의 맵 구조를 떠올렸다. '층위라니, 이건 완전히 레이드 던전 구조 그대로군.' 실없는 비교를 하는 사이에도 몸은 저절로 다음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멀리 또 다른 산자락이 구름 위에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 광경은 분명 내가 기획서에 그려 넣었던 컨셉 아트와 거의 일치했는데, 종이 위의 상상이 이렇게 눈앞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뇌를 한 번 더 흔들어놓았다. '이 정도 스케일이면 렌더링 비용만 해도 상당했을 텐데.' 나는 그런 실없는 계산까지 하며 애써 현실을 유예했다.
"그럼 최하위 층위는 안전한 축에 속하는 건가?"
"부정합니다. 최하위 층위는 마수의 개체 수가 가장 많은 구역으로, 서식 밀도가 상위 층위보다 세 배 이상 높습니다. 다만 개체당 위협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왜 하필 여기서부터 시작하는지 이해가 갔다. '숫자는 많고 하나하나는 약하다, 초심자 사냥터라는 거지.' 밸런스 기획자로서의 습관이 이럴 때 튀어나오는 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위협도는 낮고 개체 수는 많은 구간, 유저가 반복 사냥으로 스킬 숙련도를 올리도록 설계한 전형적인 초반 필드. 그 필드의 몹으로 내가 직접 뛰어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나는 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해봤는데, 놀랍게도 손끝에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오르며 붉은 빛의 입자들이 손가락 사이로 모여드는 게 보였다. '오, 이건 좀 신기한데.' 나는 그 감각에 살짝 놀라 손을 흔들어봤지만, 빛은 곧 흩어지고 사라졌다. 손끝에 남은 미미한 잔열이 마치 방금 뜨거운 컵을 쥐었다 놓은 것 같은 감촉으로 남아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투영 마법의 초기 발현입니다. 귀하의 마력 회로가 활성화되었으나, 숙련도가 부족하여 안정적인 형상화에 실패했습니다."
"투영 마법이라, 그럼 저 화살도 저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거였군." 나는 게임 속에서 짜 넣었던 스킬 설명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릭터를 만들 때 나는 분명 '마력을 화살 형태로 투영하여 발사한다'는 개념을 스킬 텍스트에 적어 넣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 내 몸에서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현실이 된다는 게, 참 어이없으면서도 짜릿하군.' 나는 다시 한번 손끝에 힘을 모아보려 했지만, 이번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게임 속에서 쿨타임이 걸린 스킬 아이콘을 눌러대는 기분이었는데, 실제로 쿨타임이라는 게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내 집중력이 부족한 건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게 더 답답했다.
"방금은 왜 안 되는 거지?"
"마력 재충전 대기 시간입니다. 현재 귀하의 회로 안정성이 낮아 재발현까지 약 십 초의 지연이 발생합니다."
"쿨타임이 진짜로 있었군."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밸런스 패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이제는 개발자가 아니라 유저 입장이라는 게 문제로군.' 시스템은 내 침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다음 사안을 브리핑했다.
"귀하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세 가지 과제가 존재합니다. 첫째, 제한된 마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 현재 최대 마력량은 표준치의 이십 퍼센트에 불과하며, 과다 사용 시 신체에 치명적 부담이 발생합니다. 둘째, 예장 '적염궁장'을 완성할 것. 예장이 완성되지 않으면 캐릭터 데이터의 잠재력을 십칠 퍼센트 이상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셋째, 마수 백 마리를 사냥하며 최소 두 달간 생존할 것. 이는 산맥 관리 규정에 따른 최소 존속 조건입니다."
나는 그 세 가지를 듣는 동안 머릿속으로 우선순위를 매겨보려 했지만, 이내 그게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셋 중 하나만 놓쳐도 죽는 구조 같은데.' 마력 관리, 장비 회수, 생존 기간. 세 조건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구조라는 게 딱 봐도 훤히 보였다. 마력을 아끼려면 사냥을 못 하고, 사냥을 못 하면 예장 재료를 못 모으고, 예장이 없으면 두 달을 버틸 전투력이 안 나온다. 나는 짐짓 여유로운 척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사망합니다."
너무나도 간결한 대답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실패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말투랑 아주 잘 어울리는 답변이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등의 문양을 다시 내려다봤는데, 그 문양이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산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 무감정한 목소리를 최소한 파트너로 여겨야 한다는 걸 인정했다. 이름도 없이 그저 '시스템'이라 부르는 이 존재가, 어쩌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라 부를 수 있는 상대일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서글프면서도 동시에 안심이 되는 게, 스스로도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일단 뭐부터 해야 하나, 대장?"
"안전지대로의 이동이 최우선입니다. 현재 위치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삼백 미터 떨어진 곳에 소규모 정착지 흔적이 감지됩니다."
"정착지 흔적이라니,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
"불명확합니다. 흔적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생존자 유무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되지 않았다는 건 결국 가봐야 안다는 소리로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 근육이 뻐근하게 저려오는 걸 보니, 이 몸도 완전히 새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오래 걸어온 흔적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낙하의 충격이 아직 덜 풀린 건지도 몰랐다. 나는 방향을 가늠하려 고개를 두어 번 돌려봤는데, 그 순간 숲 저편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낮은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낮고 걸걸했으며, 마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듯한 진동이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시스템의 음성이 곧바로 뒤따랐다.
"경고. 마수 세 개체가 접근 중입니다. 거리 약 오십 미터, 접근 속도 상승 중입니다."
나는 그 경고를 듣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벌써 튜토리얼 몹이 등장이라니, 이 게임은 로딩도 안 끝났는데 전투를 붙이는군.'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리에 힘을 주며 자세를 낮췄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요동쳤고, 손끝은 아까의 잔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식은땀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해봤던 그 짧은 순간의 감각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손을 들어 허공을 겨눠봤다. 십 초의 쿨타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확인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거리는?" 나는 낮게 물었다.
"삼십 미터. 접근 속도 재상승 중입니다. 전투 준비를 권고합니다."
전투 준비라는 말이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이 목소리를 상대로 처음 깨닫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금니를 물며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비치는 그림자를 노려봤다. 그림자는 셋으로 갈라져 있었고, 하나는 벌써 나뭇잎 사이로 붉은 눈을 번뜩이며 이쪽을 향해 곧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