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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듯한 공간에 서 있었다. 발밑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떨어지지 않았고, 사방은 짙은 어둠이었지만 시야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했으며, 저 멀리서부터 희미한 붉은 빛의 입자들이 눈발처럼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로딩 화면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몸을 움직여봤는데, 통증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덜미를 만져봐도 상처는 없었고, 갈비뼈를 눌러봐도 아까 느꼈던 둔탁한 통증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보며 감각을 확인해봤지만 전부 멀쩡했고,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려봐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중력도 없고 소리도 없고, 이거 완전히 진공 상태인가.'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 입자들은 점점 한 곳으로 모여들며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활의 형상이었다.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절반쯤은 빛으로 채워지고 나머지 절반은 텅 빈 윤곽선만 남은 미완성의 활이었으며, 그 위로 희미하게 문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문자들은 내가 알아볼 수 없는 형태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뜻만큼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활에 손끝을 가져다 댔는데, 그 순간 머릿속으로 낯선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화살의 궤적을 계산하는 법, 마력을 응축하는 순서, 예장의 각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들이 뒤섞여 흘러들어왔고, 그 정보량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시야 한쪽이 하얗게 점멸했고, 뇌 속에서 뭔가가 빠르게 재배열되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이 스쳤다. '이건 무슨 튜토리얼 컷씬 같은데, 좀 더 부드럽게 알려줘도 되지 않나.'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 지식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정보가 다 들어오고 나자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이상한 후련함이 남았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그 공간에서도 여전히 들려왔다. "현재 귀하는 각성 유예 공간에 진입한 상태입니다. 신체가 치명적 손상을 입었을 때, 이 공간이 임시 안전지대로서 발현됩니다." "그럼 목숨이 아슬아슬할 때만 이런 특별 대접을 받는다는 거로군." 나는 픽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 웃음 뒤편에는 안도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죽을 뻔했다는 자각이 뒤늦게 밀려들었고, 그제야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나는 애써 그 떨림을 무시하며 다시 활의 형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뭐지, 이 활 말이야." "예장 '적염궁장'의 미완성 투영체입니다. 현재 완성도 십칠 퍼센트에 해당하는 형상만 발현 가능합니다." "십칠 퍼센트로도 방금 그 마수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잡았는데, 완성되면 어느 정도가 되는 건가?" 나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십칠 퍼센트만으로 그 정도였다면, 완성된 형태는 대체 얼마나 사기적인 물건일지 상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시스템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완성 시 최소 5배 이상의 마력 효율 상승과, 화살의 형상 안정화가 예상됩니다. 다만 완성을 위해서는 산맥 내 흩어진 예장 파편을 회수해야 합니다." "그럼 이 산속에 그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는 소리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보를 정리했다. "몇 개나 필요하지?" "정확한 개수는 파편의 반응 여부에 따라 가변적입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산정이 불가능합니다." "결국 발로 뛰면서 찾으라는 소리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나 보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었다. 이 공간에서의 대화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지만, 곧 붉은 입자들이 다시 흩어지기 시작하며 공간 전체가 서서히 밝아졌다. 나는 그 빛이 눈부셔 살짝 눈을 찡그렸는데, 마치 무언가가 이 공간의 문을 닫으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스템은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였다. "의식 복귀를 시작합니다. 복귀 후 신체는 최소한의 생존 가능 상태로 회복되나, 완전한 회복은 아닙니다."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니, 그럼 얼마나 아픈 채로 눈을 뜨는 거지?" 나는 그렇게 물으려 했지만, 대답을 듣기도 전에 시야가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감각은 어딘가 붉은 입자 하나가 내 이마에 닿는 듯한 미묘한 온기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습한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코끝으로 젖은 흙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여 훅 끼쳐왔고, 귓가로는 벌레 우는 소리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뒤늦게 흘러들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갈비뼈 부근에서 둔한 통증이 치솟았는데, 그건 각성 공간에서 느꼈던 무통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지극히 현실적인 고통이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팔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주변을 둘러보니 골각랑의 사체 두 마리가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다. 뼈로 뒤덮인 몸통에 화살이 정확히 박혀 있는 모습을 보며, 방금 전까지의 사투가 꿈이 아니었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세 번째 짐승은 보이지 않았다. '그 마지막 놈은 어디로 간 거지.' 나는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 다른 위협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친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해지는 답은 아니었다. 나는 팔뚝의 상처를 확인했는데, 이빨에 긁힌 자국이 붉게 부풀어 있었지만 출혈은 이미 멈춘 상태였다. 손끝으로 살짝 눌러보니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뼈까지는 다치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다행인가.' 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는데, 그 순간 저 멀리 나무 사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라기보다는 마른 나뭇잎을 스치는 옷깃 소리 같은, 아주 미미한 진동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는데, 시스템이 곧바로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경고. 미확인 생체 신호 감지. 인간형 존재로 추정됩니다." "인간형이라니, 그럼 여기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소린가?" 나는 나무 그늘 사이로 시선을 던지며 조심스레 자세를 낮췄다.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지만, 방금 겪은 전투에 비하면 이 정도 긴장쯤은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뭇잎 틈으로 보이는 형체는 확실히 인간의 실루엣이었는데, 몸집이 나보다 훨씬 작았고 옷차림이 낡고 헤진 상태였다. 걸음걸이는 어딘가 불안정했고, 이따금 멈춰 서서 주변을 살피는 몸짓이 나만큼이나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였다. '설마 나처럼 여기로 떨어진 사람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무작정 화살을 날릴 게 아니라 은신하며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시스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저 사람, 적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나?" "불가능합니다. 본 시스템의 탐지 범위는 마수 개체에 한정되어 있으며, 인간형 존재의 적대성 판단은 귀하의 직접 관찰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럼 나 혼자 눈치껏 판단하라는 거로군."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더욱 낮췄다. 세상 참 친절하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럴 때 시스템에게 불평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나뭇잎 사이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인영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낡은 천으로 몸을 감싼 그 모습은 이 산에 오래 갇혀 있었던 사람처럼 초췌해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어딘가 위태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아니면 나처럼 이 알 수 없는 세계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또 다른 누군가인지, 그 어느 쪽으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인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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