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봉인된 마신의 후계자

4화

봉인이 약해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다음 날부터, 유하 신왕은 나를 데리고 이상한 곳들을 오갔다. 서울 어느 재개발 지역, 사람 없는 공터, 그리고 산속 폐사찰까지. 하나같이 인적이 드물고 이상하게 공기가 무거운 곳들이었다. 처음 갔던 재개발 지역에서는 콧속이 시큰거렸다. 먼지 냄새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뭔가 태운 냄새, 그런데 불이 난 흔적은 없는. 두 번째로 갔던 공터는 한여름인데도 발밑이 서늘했다. 신발 밑창을 뚫고 냉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달까. 세 번째, 폐사찰에 도착했을 때는 아예 귀가 먹먹했다. 마치 비행기 이륙할 때처럼, 삐이익— 하는 이명이 잠깐 울리다 사라졌다. "여기가 뭔데요." "경계입니다. 원계와 신계가 겹치는 자리입니다." 경계라니. 무슨 부동산 용어처럼 들리는데, 그런 느낌이 아니라는 건 이미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있었다. [신계는 총 세 개의 계로 나뉩니다. 신계, 원계, 그리고 마계입니다.] 목소리가 갑자기 설명을 시작했다. 마치 참았던 걸 터뜨리는 느낌으로. "아니 잠깐, 갑자기 웬 강의예요." [중요한 내용입니다. 집중하십시오.] 목소리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얘도 뭔가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신계는 신들이 다스리는 상위 세계, 원계는 인간이 사는 지금 이곳, 마계는 마족이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그럼 흑마는 마계 소속이에요?" [흑마 제존은 마계 최강의 존재였습니다. 신계를 침공했다가 태현 신존님께 패배해 혼돈결계에 봉인되었습니다.] "봉인된 곳이 여기예요?" [정확히는, 이 원계 전역이 흑마 제존의 마지막 봉인지입니다.]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매일 밥 먹고 학교 가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사던 이 세계가, 마왕이 갇힌 감옥이었다니. 편의점 알바생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야간에 삼각김밥 유통기한 확인하다가 세계가 감옥이라는 소리 들으면 아마 사표 쓸 것 같다. "그럼 그 봉인이 약해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유하 신왕이 처음으로 표정을 흐렸다. "흑마 제존이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원계 전체가 그의 첫 번째 먹잇감이 될 겁니다." 먹잇감. 그 단어가 유독 걸렸다. 마치 우리가 무슨 뷔페 식재료 취급받는 느낌이었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데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신존님께서 남기신 천기비록에 따르면, 길어야 세 계절입니다." 세 계절. 봄, 여름, 가을. 그러면 겨울이 오기 전에 마왕이 되살아난다는 소리다. 수능도, 졸업도, 그다음 일상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소리.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이 여름 초반이니까, 대충 넉 달? 다섯 달? 그 안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 수학 정석 1권도 다 못 풀었는데. [동요하지 마십시오. 아직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뭔데요." [천기비록을 완전히 해석하고, 신력을 각성한 존재가 흑마의 근원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저예요?"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나는 그 몇 초의 정적 속에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동시에 만약 아니라고 하면 그다음엔 또 뭘 해야 하나 싶은 그런 이상한 마음까지. 유하 신왕이 폐사찰 마당 한가운데 멈춰섰다. 낡은 대웅전 기둥에는 이끼가 잔뜩 껴 있었고, 마당 흙바닥 사이사이로 잡초가 무성했다. 그런데 그 잡초들이 이상하게 한 방향으로만 누워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이도훈 씨." 처음으로 존댓말에 '씨'가 붙었다. 그 호칭이 붙는 순간, 어깨가 저절로 굳었다. 뭔가 격식 차린 말이 나올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당신이 정말 신존님이 지목하신 존재인지, 저희 신왕들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확인하는데요." "시험을 통해서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학교에서도 시험이라면 지긋지긋한데, 신계에서도 시험을 본다니. 이 세계는 대체 얼마나 시험 중심 사회인 건가. 마당 저편에서 바람이 갈라지듯 흔들리더니,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콰앙, 하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마치 공기가 한 겹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짧게 울렸다. 그 틈에서 걸어 나온 건 키가 작고 단정한 백발의 여성이었다. 눈빛이 서늘하다 못해 얼음 같았다. 옷차림부터 유하 신왕과는 결이 달랐다. 유하 신왕이 하얀 로브 같은 걸 걸치고 있었다면, 이쪽은 딱딱한 갑주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마치 전투용이라고 써 붙인 듯한 차림이었다. "설화 신왕이십니다." 유하 신왕이 소개했다. "당신이 이도훈이라는 소년이군요." 설화 신왕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의심이 섞여 있었다. 목소리 자체는 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당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저절로 자세를 고쳐 세웠다. "태현 신존께서 목숨을 걸고 지목하신 존재라면, 응당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저기, 저는 그런 자격 같은 거 없다고요. 저 그냥 평범—" "평범한 자에게는 신력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말이 딱 잘려나갔다. 칼로 자른 것 같은 말투였다. 아니,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주면 안 되나.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입 밖으로는 한 글자도 못 냈다. "내일 정오, 이곳에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저기, 제 의견은—"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이쪽도 자르는 타이밍이 기막히게 정확했다. 유하 신왕이랑 설화 신왕, 이 둘이 짜고 나를 말 못 하게 훈련시키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설화 신왕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봉인이 약해지는 속도를 생각하면,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신왕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방금까지 마당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다음 순간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잡초만 다시 원래대로 눕혀지듯 흔들렸다. 남은 건 나와, 머릿속에서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 그리고 세 계절이라는 시한부 선고뿐이었다. 폐사찰 마당에 혼자 서 있으니 그제야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손끝까지 떨리고 있었다. "…이거 실화냐." 혼자 중얼거려봤지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내일 시험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를 어떻게 해요, 저 신력이라는 거 쓸 줄도 모르는데." […그건 저도 걱정입니다.] "목소리 씨는 걱정도 해요?" [네. 사실 어제부터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답이 이상하게 든든하면서도, 더 불안했다. 나는 폐사찰 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흙바닥이 축축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근데 목소리 씨, 신력이란 게 정확히 뭔데요. 그냥 마법 같은 거예요?"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그럼 저 지금 배 째면 뭐 마법진 같은 게 있어요?" […그런 질문은 시험 전날에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왜요." [불필요하게 불안해지실 수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불안한데 뭘 더 어떻게 불안해지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목소리의 말투에서 뭔가 진지함이 느껴져서 더 묻지는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폐사찰 마당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대웅전 기와지붕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가, 이내 다시 날아올랐다. 그 날갯짓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세 계절. 그 안에 나는 자격을 증명해야 하고, 신력을 각성해야 하고, 마왕이라는 존재와 맞서야 한다. 수능 D-100도 아니고, 세계 멸망 D-100이라니.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게 물든 저녁하늘이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 하늘 아래 모든 게, 마왕이 눈뜨는 순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다. 내일 정오. 시험. 나는 그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대체 어떤 시험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번엔 오답노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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