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자가 끝난 시각은 밤 열 시였다.
교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완전히 까맸고, 형광등 밑에서 세 시간을 버틴 눈알은 뻑뻑했다.
가방을 챙기며 옆자리 애가 "너 오늘도 편의점 갈 거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 대신 한숨만 쉬었다.
매일 가는 게 뻔한데 뭘 묻고 그래.
교문을 나설 때마다 편의점 불빛이 유난히 반가웠다.
저 노란 불빛 하나가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딸랑, 하는 종소리가 났고,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 오늘도 하루가 끝났구나 싶었다.
삼각김밥 하나, 초코우유 하나.
이번 달 용돈은 이미 반토막이 났다.
정확히는 반토막이 아니라 거의 다 날아갔는데, 그냥 반토막이라고 해두자. 정신 건강에 좋으니까.
계산대 앞에서 동전을 세는 내 모습이 처량했지만, 뭐, 익숙한 처량함이었다.
알바생 누나도 이제는 익숙한지 별 반응 없이 바코드를 찍었다.
"천이백 원입니다."
동전을 꺼내는 손끝이 차가웠다. 벌써 밤바람이 제법 매웠다.
집으로 가는 골목은 늘 똑같은 순서로 어두워졌다.
편의점 불빛이 멀어지고, 상가 간판들이 하나씩 꺼지고, 마지막으로 남는 건 가로등뿐이었다.
가로등 세 개, 그중 하나는 늘 깜빡였다.
저 가로등은 언제 고치려나, 매번 생각하면서도 매번 그냥 지나쳤다.
민원을 넣기엔 귀찮고, 그냥 참기엔 은근히 신경 쓰이는, 딱 그 정도의 불편함이었다.
그 깜빡이는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
···뭐지?
분명 눈을 뜨고 있었는데, 보이는 건 골목이 아니었다.
발밑의 아스팔트도, 옆집 담벼락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거대한 궁전 같은 공간, 붉은 기둥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기둥 하나의 굵기가 우리 학교 운동장 나무보다 열 배는 더 두꺼워 보였고, 그 표면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웠다. 마치 압력이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숨을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묵직했다.
그 기둥들 사이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은발에, 눈동자가 금빛으로 타오르는 남자였다.
갑옷은 반쯤 부서져 있었고, 가슴께에서 검은 기운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 검은 기운은 마치 연기처럼 퍼졌다가 다시 그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멀리서 보는데도 그게 몸에 좋은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신존님! 뒤를 조심하십시오!"
누군가 외쳤다. 목소리는 여자였다.
날카롭고 다급한,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남자가 몸을 돌리는 순간, 두 개의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하나는 핏빛 갑주를 입은 자, 다른 하나는 거대한 체구의 자였다.
핏빛 갑주를 입은 자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등 뒤로 뭔가 날개 비슷한 것이 그림자처럼 늘어져 있었다.
거대한 체구의 자는 그냥 덩치가 산만 했다. 저게 사람이라고?
"태현, 오늘로 천기비록은 우리 것이다."
핏빛 갑주가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짙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 눈빛이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예전에 학교 짱이 시비 걸 때 짓던 표정이랑 비슷했다.
아니, 지금 그런 걸 비교할 때가 아닌데.
남자는— 아마 저 사람이 태현이라는 사람인 듯했다 — 피 묻은 입술로 짧게 웃었다.
"혈영, 네놈은 아직도 그 성격이 여전하구나."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도, 저 남자는 아직도 웃을 여유가 있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미쳤다고 해야 하나.
콰앙!
그 순간 세상이 다시 하얘졌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전히 골목에 서 있었다.
손에는 초코우유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캔은 아직 차가웠고, 손가락 사이로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계를 봤다. 십 초도 지나지 않았다.
"…뭐야, 방금."
혼잣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환각인가, 아니면 저녁을 굶고 다닌 대가인가.
요즘 급식도 대충 먹고 야자 시간에 몰래 자느라 밥 시간을 자주 놓쳤는데, 그 대가로 뇌가 헛것을 보여주는 건가 싶었다.
뭐가 됐든 배는 고팠다.
삼각김밥을 뜯었다.
비닐 포장이 손끝에서 조금 뻑뻑하게 벗겨지고, 참치마요 냄새가 확 풍겼다.
한 입 베어 물은 순간, 발밑이 흔들렸다.
쿠구구궁—
지진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하늘이 이상했다.
구름 한 점 없던 밤하늘에 균열 같은 빛이 그어지고 있었다.
마치 유리에 금이 가는 것처럼, 조용하고 느리게.
색깔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다. 보랏빛도 아니고 은빛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딘가.
가로등도, 편의점 간판도, 저 균열 앞에서는 하나같이 초라해 보였다.
"저게 뭐야…"
씹던 삼각김밥을 그대로 삼켰다. 목구멍이 뻑뻑했다.
그때 옆 건물 옥상에서 낡은 간판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삐이익— 콰당!
녹슨 철제 프레임이 바람에 흔들리다 기어이 나사가 풀린 모양이었다.
간판이 떨어진 곳은 하필,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 있던 자리였다.
아이는 이어폰을 낀 채 휴대폰만 보고 있었는지, 위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아이는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몸이 먼저 튀어나갔다.
삼각김밥이 손에서 떨어지는 것도, 초코우유가 바닥에 굴러가는 것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비켜!"
손을 뻗어 아이를 밀치는 순간, 간판이 내 등을 덮쳤다.
무겁고 뜨거운 통증이 등줄기를 갈랐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번쩍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프긴 한데, 부서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가 내 몸 안에서 그 충격을 흡수하는 느낌.
등뼈가 부러졌다면 이 정도로 서 있을 수는 없을 텐데, 나는 여전히 두 발로 버티고 있었다.
【각성 — 미지의 신력을 감지합니다.】
···뭐? 지금 뭔가 내 눈앞에 글자가 뜬 건가.
분명 허공에 글씨가 있었다. 반투명하고, 푸른빛이었다.
꼭 게임 로딩 화면에서 보던 폰트 같았는데, 이게 지금 내 시야 한복판에 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잠깐 내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아까 그 궁전 환상이며, 이 글자며, 오늘 나 진짜 괜찮은 건가.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의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목소리입니다.]
또렷하고 담담한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 이상하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꼭 안내 방송 같은 톤이었다. 지하철에서 "이번 역은" 하고 말하는 그 목소리랑 비슷한 무미건조함.
"…누구세요?"
입 밖으로 소리가 나갔는데, 아이는 그런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다른 사람은 못 듣는구나.
아이 눈에는 지금 내가 그냥 등에 간판 맞고 혼잣말하는 이상한 고등학생으로 보일 텐데.
나중에 이 동네에 이상한 애 소문 안 나야 할 텐데, 그런 걱정이 잠깐 스쳤다.
[설명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그 힘을 쓰셔야 합니다.]
"힘? 무슨 힘인데?"
목소리가 커졌다. 등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통증이 퍼지고 있었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정신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손을 앞으로 뻗으십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내가 뻗은 게 아니라, 뻗어진 느낌이었다. 마치 누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 올리는 것처럼.
손끝에서 은은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아까 그 은발 남자의 눈동자 색과 똑같았다.
등을 짓누르던 간판이 스스륵 밀려나며 옆으로 떨어졌다.
철퍽. 진흙탕에 처박히는 소리.
다행히 간판은 빗물 고인 웅덩이에 떨어졌다.
다행히 아이도 무사했다.
다행히—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이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뭐라 말도 없이 그냥 뒤돌아 뛰어갔다.
아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해주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초등학생한테 뭘 바라겠어.
"방금… 나 뭐 한 거야?"
숨이 가빴다. 손끝이 아직도 저릿저릿했다.
[신력을 처음으로 개방하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사무적이었다.
뭐야, 사람 놀래키고 축하는 또 무슨.
꼭 통신사 광고 문자 같은 말투였다. "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요금제가 변경되었습니다." 그런 느낌.
"축하는 무슨. 지금 나 등짝에 간판 맞았거든요."
말이 자꾸 존댓말로 나가는 게 웃겼다. 상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인데도, 예의는 지키고 싶은 이 습관이 어이없었다.
[통증은 곧 완화될 것입니다. 신력이 신체 손상을 자동으로 복구하고 있습니다.]
"자동으로… 복구? 지금 내 몸이 그런 기능이 있었다고?"
말하다 보니 등의 통증이 정말로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마치 뜨거운 물찜팩을 오래 대고 있었던 것처럼, 아픔이 서서히 무뎌지는 느낌.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안 아프다는데 굳이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좋은 소식만은 아닙니다.]
"…뭐가 더 있는데."
목소리를 낮췄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꼭 시험 성적 말하기 전에 부모님이 "근데 말이야" 하고 뜸 들이는 그 타이밍 같았다.
[방금 그 힘의 파장이, 이미 다른 세계에 감지되었습니다.]
등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그 뜨끈한 회복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오싹함이었다.
하늘의 균열은 여전히 조용히,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넓어진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누군가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나는 바닥에 떨어진 초코우유를 주워 들었다.
캔은 이미 다 식어버렸는데도, 나는 그걸 꽉 움켜쥐었다.
방금 본 그 은발 남자의 얼굴이, 그리고 그를 노려보던 두 그림자의 눈빛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설마 저 균열이랑 내가 지금 무슨 상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물었지만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하늘의 금빛 균열은, 이제 내 눈에도 확연히 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