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둠 속에서 피 냄새가 났다.
비릿하고 무거운, 살아있는 것의 냄새가 아니라 죽어가는 것의 냄새였다.
손목이 찢어졌다.
왼쪽 어깨뼈가 삐걱거렸고, 무릎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갈비뼈 어딘가도 부러진 것 같았는데, 정확히 몇 개인지는 셀 정신도 없었다.
흑정굴 깊은 곳, 빛 한 줌 들지 않는 이 자리에서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바닥은 습기로 미끄러웠고, 벽에서는 이따금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또렷이 들렸다. 똑, 똑. 마치 시간을 재는 것처럼.
"버틸 줄 알았느냐."
놈이 말했다.
한무천.
검은 안개처럼 흩어진 그의 몸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냉기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상처 부위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통증인지 냉기인지 구분이 안 됐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검을 다시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억지로 접었다. 검자루가 미끄러웠다. 땀인지 피인지 모르겠다.
[검의(剑意) 3성. 잔여 내력 9%.]
숫자가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
9퍼센트라니.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유통기한 체크하던 시절엔 이런 숫자를 볼 일이 없었는데.
망했다.
4년 전, 나는 평범했다.
스무 살, 대학도 못 가고 편의점 야간 알바를 뛰던 청년.
시급 9,860원. 야간수당 붙어도 한 달에 백만 원 겨우 넘겼다. 그때는 그게 인생의 전부였다. 다음 달 월세, 편의점 폐기 도시락, 그 정도가 내 우주였다.
그 편의점 뒷골목에서 노인 하나를 만났다.
피투성이였고,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취객이라고 생각했다. 뒷골목엔 종종 그런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으니까. 신고할까, 그냥 지나갈까 잠깐 고민했던 것도 기억한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그런데 노인의 눈이 나를 봤다.
그 눈빛에 뭔가가 있었다. 취객의 눈빛이 아니었다.
"살려달란 말은 안 하마."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피를 그렇게 흘리면서도.
"검을 쥘 것이냐."
그때 그 손에 검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정확히는, 검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검이 아니라 검의 흔적, 검이 남긴 의지 같은 것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 걸 이해할 머리가 없었다.
나는 그때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뿐이었다.
왜 끄덕였는지 지금도 설명 못 한다. 그냥,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게 다였다.
그날 이후로 손끝에서 검의가 흘렀다.
처음 한 달은 매일 토했다. 몸에 안 맞는 기운이 들어온다는 게 그런 느낌인 줄 몰랐다. 뼈가 새로 자라는 것 같은 통증, 근육이 재조립되는 것 같은 감각. 스승은 그걸 보고 웃었다.
"원래 다 그렇다."
그게 다였다. 위로도 없고 설명도 없었다.
1년이 지나고, 검의 1성.
2년이 지나고, 검의 2성.
그리고 4년째, 겨우 3성.
고작 하나가 올랐다.
그리고 그 하나가, 지금 이 순간 목숨을 걸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그 스승은 죽었다.
반년 전, 어느 산속 오두막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프다는 말 한 번 안 했다. 죽는 그 날 아침에도 마당을 쓸고 있었으니까.
유언은 하나였다.
"별의 문에 내 유골을 뿌려다오."
그게 다였다. 더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그 뒤로 며칠을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그 별의 문이 이 흑정굴 밑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왔다.
와서 보니 흑정굴은 지도에도 안 나오는 곳이었고, 입구부터 이상한 기운이 흘렀다. 들어가지 말라는 직감이 온몸을 두드렸는데도 들어왔다. 스승의 유언이었으니까.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지경이 됐다.
한무천은 이 굴의 주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굴에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였다. 내가 유골함을 들고 걸어가던 그 순간, 벽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약하다."
한무천의 목소리가 굴 전체를 울렸다. 그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뼈로도 들리는 것 같았다. 온몸이 진동했다.
"네 스승이 나를 이겼을 땐 지금의 나보다 절반도 안 됐거늘."
절반?
지금 이게 절반이라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때 좀 봐주지 그랬어요."
말은 이렇게 뱉었는데 속으로는 딴생각이었다. 절반으로 이런 괴물이었으면, 스승은 대체 뭘 상대했던 거지. 그 노인네, 마당 쓸던 그 손으로 이런 걸 이겼다고?
놈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뼈를 긁는 것 같았다. 소리 자체가 물리적인 압력처럼 느껴졌다. 고막이 아니라 두개골 안쪽이 울렸다.
검이 날아왔다.
몸을 틀었다.
피하지 못했다.
왼팔이 갈라졌다, 뜨거웠다.
뜨거운 게 먼저 오고, 그다음에 통증이 왔다. 순서가 그랬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이 몸이 위험을 감지하는 속도가 통증을 느끼는 속도보다 늘 한 발 늦었다.
주저앉을 뻔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버텼다.
버텨야 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유골도, 유언도, 다 끝이었다.
품 안에 있는 유골함의 무게가 갑자기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작은 상자 하나가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내력 4%. 위험 수준 도달.]
건조한 알림이었다.
감정도 없이 딱, 하나의 사실만 던졌다.
나는 그 알림을 보며 이를 갈았다.
좋다, 다 좋은데.
이제 뭘 어떻게 하냐고.
내력 4퍼센트로 뭘 할 수 있나. 검을 휘두를 힘도 없는데. 이 상태로 한 걸음이라도 더 뒤로 물러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놈이 다시 다가왔다.
발소리는 없었다. 그냥 거리가 줄어들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접히는 것 같았다.
검은 손이, 아니 손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무언가가 내 목을 향해 뻗어왔다.
죽는다.
그 생각이 또렷하게 들었다.
이상하게 그 순간엔 무섭지 않았다. 그냥, 아,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담담한 확인 같은 감정이었다. 스승도 이렇게 담담하게 죽었을까.
그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멈추어라.'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아니 가슴 한복판에서 들린 소리였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어떤 굴 전체를 울리는 한무천의 목소리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졌다. 명령이라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이미 결정된 사실 같았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멈췄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무천의 손이 목젖 바로 앞에서 멈췄다.
놈도 놀란 눈치였다.
"……뭐지, 이건."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확신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가 걷혔다.
나도 모른다.
나도 지금 이게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이 뒤늦게 따라왔다. 편의점 뒷골목, 피투성이 노인, 낮지만 흔들림 없던 그 말투.
설마.
굴 안의 어둠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마저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