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건 냄새였다. 곰팡이와 약탕 냄새가 뒤섞인, 지독하게 가난한 냄새. 코를 찌르는 그 냄새에 정신이 확 들었다.
'여기 어디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뼈만 남은 팔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구백 년 동안 천하를 짓밟았던 그 팔이 아니었다. 살가죽 아래로 뼈의 윤곽이 그대로 만져지는, 시체나 다름없는 팔이었다.
'이게 뭐야, 씨발.'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눈동자만 굴려 천장을 살폈다. 낡은 서까래에 거미줄이 늘어져 있었고, 벽에는 습기로 얼룩진 자국이 지도처럼 번져 있었다.
"도련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늙은 하녀 하나가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손에 든 약사발을 바닥에 내려놓을 새도 없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도련님이라니. 나 선우강인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낯선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강도현(姜道賢). 강씨세가(姜氏世家)의 몰락한 서출. 삼 년째 혼수상태였다가 방금 깨어난 폐인. 밀려드는 기억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이름, 얼굴, 세가의 서열, 하인들의 이름까지 순서 없이 뭉텅이로 쏟아졌다.
'환생이라니, 이게 무슨 삼류 소설 같은 전개야.' 나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몸이 너무 아파서 그럴 힘도 없었다. 웃으려는데 갈비뼈 사이에서 뻐걱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삼류 소설 주인공 노릇도 몸이 받쳐줘야 하는 거였다.
밀려드는 기억을 정리하자 그림이 그려졌다. 강도현이라는 이 몸은 원래 오품(五品) 이상의 성맥(星脈)을 지닌 천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열 살 되던 해, 계모(繼母) 한서옥(韓瑞玉)이 무슨 수를 썼는지 그 성맥을 강제로 발췌(拔萃)해서 이부동생 강도명(姜道明)에게 이식(移植)해버렸다. 그날 이후 강도현은 삼 년 동안 정신을 잃었고, 깨어난 지금은 성맥도 없고 내단(內丹)도 없는 완전한 폐인이었다.
'성맥을 발췌해서 이식? 그게 되는 거였어?' 천무대제로 구백 년을 살면서도 그런 방식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람 몸에서 기운을 뽑아 다른 사람에게 옮겨 심는다는 건,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던 금기술이었다. 그런데 그걸 실제로 해냈다는 계모라는 여자, 정상은 아니었다.
'거기다 신혈(神血)까지 빼갔다고?' 하녀의 두서없는 하소연 속에서 그 사실을 건졌을 때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신혈이란 건 사람 몸에 백 년에 한 번 스치듯 지나가는 극귀한 기운인데, 그걸 뽑아냈다는 건 몸 자체를 망가뜨릴 각오를 했다는 뜻이었다. '이 여자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는 이 몸의 주인이 그동안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대략 짐작이 갔다. 사람이 아니라 재료였던 거다.
"그 신혈이... 천화신궁(天華神宮)의 이현모(李賢模) 나리께 팔렸다고 합니다. 만상보전(萬象寶殿) 입장권 하나랑 바꿨다더군요." 하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주변을 두 번이나 살피고서야 겨우 뱉는 말이었다.
'입장권 하나에 내 몸을 팔았다? 개새끼가 산정가는 하네.'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천무대제 시절이었다면 그 이현모라는 놈 목을 손가락 하나로 뽑아버렸을 텐데, 지금은 이 손가락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을 겨우 까딱여 봤지만 그마저도 부들부들 떨렸다. '이 꼴로 뭘 하겠다는 거야.' 자조가 절로 나왔다.
그때 밖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쿵, 쿵, 마룻바닥을 짓밟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이 폐인 새끼가 아직 살아있었네?" 유태식(劉太植)이었다. 세가의 잡일을 관리하는 하인이었지만, 뒷배가 있다는 이유로 안하무인이었다. 배가 나온 몸을 뒤뚱거리며 걸어 들어오는 꼴이, 여기서만큼은 자기가 왕인 줄 아는 표정이었다. 그 뒤로 낯선 여인 하나가 팔을 붙잡힌 채 끌려오고 있었다. 마르고 흰 얼굴, 겁먹은 눈빛.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년이 도련님 약값 훔쳐 먹었다고 해서 데려온 거요." 유태식이 히죽거리며 그녀의 팔을 더 세게 틀었다. 여인이 작게 비명을 삼켰다. 팔이 뒤로 꺾이는 각도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에요, 저는... 저는 정말 안 훔쳤어요."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유태식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건 뭐 하는 새낀데.' 나는 이 몸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정체를 찾아냈다. 이서린(李書璃). 어머니의 옛 시녀였고, 내가 혼수상태였던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곁을 지켰다던 여자. 약값을 훔칠 이유가 없는, 오히려 자기 몫의 밥까지 팔아 약값을 대던 사람이었다.
늙은 하녀가 옆에서 사색이 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이 집안에서 유태식에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유태식의 손이 그녀의 뺨을 향해 올라가는 순간, 나는 이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