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실.
밤 열 시, 폐관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도훈은 후드를 눌러쓴 채 담벼락을 따라 조심스레 이동했다. 전생의 감각으로 순찰 경로와 CCTV 사각지대를 미리 계산해 둔 터였다.
'이십 분 간격. 담당 경비는 두 명. 순찰 동선은 정문에서 서관을 돌아 다시 정문으로.'
머릿속으로 그린 도면 위에 자신의 위치를 겹쳐보았다. 수백 년 전, 적진의 성벽을 넘나들던 그때의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다만 그때는 갑옷을 두르고 검을 찬 몸이었고, 지금은 야자 자율학습을 빼먹고 나온 고3짜리 마른 몸뚱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격세지감이로다.'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삼켰다.
'미안하지만, 딱 한 번뿐이다.'
허대수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특별전으로 전시 중인 신라 금동 무사상은 개관 이래 최고 수준의 보안 등급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훈은 개의치 않았다.
'훔칠 생각은 없다. 그저, 잠깐 만져만 볼 뿐이다.'
비상구 근처, 오래된 배관을 타고 오르며 도훈은 창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십팔 세 소년의 마른 몸이 이럴 때는 오히려 유용했다.
'이럴 때만큼은 이 볼품없는 몸뚱이도 쓸모가 있구나.'
창틀에 매달린 채 잠시 숨을 골랐다. 손끝에 닿는 낡은 페인트의 질감, 저 아래로 보이는 정원의 어둠, 그 모든 것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전시실 안, 조명이 은은하게 무사상을 비추고 있었다. 금동으로 빚어진 무사의 형상은 천 년 넘는 세월을 견뎌낸 위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눈매, 갑주의 미세한 문양 하나하나까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정교했다.
도훈은 그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저것이다.'
손끝이 유리 진열장에 닿는 순간—
'.....!'
숨이 멎을 뻔했다.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유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짙은 기운이 무사상 안쪽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청동 방울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마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짐승이 낮은 숨을 몰아쉬는 듯한, 그런 무게감이었다.
'이거다. 이거야말로.'
도훈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유리를 조심스레 밀어 열고, 손바닥을 무사상 표면에 가져다 댔다.
순간,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끄윽—'
도훈은 이를 악물었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단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예상보다 훨씬 강렬한 유입이었다.
'막지 마라, 이대로, 조금만 더.'
혈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발끝까지 저릿하게 퍼졌다. 백 년은 굶주린 자가 처음으로 곡기를 입에 댄 기분이었다. 도훈은 이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지기를 바랐다.
그 순간, 전시실 조명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지지직—
도훈이 흡수하는 기운의 파동이 주변 전자기기에 간섭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 밖의 부작용이었다.
'멈춰야 한다.'
도훈은 급히 손을 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삐이이이익—!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도훈은 재빨리 몸을 낮추고 창가로 향했다. 그런데 창밖에서, 이미 그림자 두 개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이 속도는.'
일반 경비원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발소리 하나 없이, 그러나 빠르게. 도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훈련받은 자들이다.'
전시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두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한 명은 이 미터에 가까운 거구, 국자형 얼굴에 짧게 깎은 머리, 팔뚝의 근육이 옷 위로도 드러날 정도였다. 다른 한 명은 그와 대조적으로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가슴께에 새겨진 작은 표식이 도훈의 눈에 들어왔다.
'국가특수작전부.'
도훈은 그 표식을 알아보았다. 미래에서 몇 번 마주쳤던 조직이었다. 영기 관련 이변에 즉각 대응하는 국가 소속 특수 요원들.
'벌써 이 시대에도 존재했나.'
뒷목이 뻐근해졌다.
'설마 벌써 조직화가 되어 있을 줄이야. 이건 계산에 없던 변수다.'
"거기, 움직이지 마."
마른 체형의 남자가 낮게 경고했다. 거구의 남자는 이미 도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발밑에서 유리 조각 밟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들켰다. 이대로면 잡힌다.'
도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전생의 힘은 아직 십 분의 일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승산이 없다.'
'저 거구, 무공의 흔적은 아니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실전으로 다져진 몸.'
'그렇다면.'
도훈은 순간, 표정을 완전히 바꿨다. 겁에 질린 듯 몸을 웅크리고, 눈에 눈물까지 살짝 맺히게 했다. 눈꺼풀에 힘을 풀고 숨을 짧게 몰아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겁먹은 아이의 표정 따위, 이제는 눈 감고도 지을 수 있었다.
"저, 저기요! 잘못했어요! 친구들이랑 담력 시험 하다가—"
거구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담력 시험?"
"네! 저희 학교에서 유행이라고, 밤에 박물관 들어가면 인증샷 찍는 게—"
도훈은 마치 정말 겁먹은 열여덟 살 소년처럼 말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목소리를 떨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급기야 코까지 훌쩍였다.
"애들이 저보고 겁쟁이라고 놀려서요. 진짜 딱 사진 한 장만 찍으려고—"
'믿어라. 그냥 철없는 학생 하나가 잘못 들어온 것으로.'
마른 체형의 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무사상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작은 계측 장비가 들려 있었다. 장비가 삐빅거리며 반응했다.
"미세한 에너지 반응이 있습니다."
"저 학생한테서?"
"아니요, 무사상 쪽에서. 다만 수치가 너무 낮아서, 오작동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거구의 남자가 도훈을 다시 훑어보았다. 위아래로, 마치 뼈까지 들여다보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제발.'
도훈은 속으로 빌면서도, 겉으로는 계속 훌쩍이는 척했다. 무릎까지 살짝 떨어 보였다.
"이름이 뭐야."
"이, 이도훈이요. 저희 학교는—"
"학교까지는 됐고."
남자는 잠시 도훈을 뜯어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 장난에 이런 데까지 출동하게 만들다니."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도훈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올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잔뜩 겁먹은 표정을 유지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라.'
마른 체형의 남자가 계측 장비를 다시 확인했다. 화면 위 숫자가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수치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시적 오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오류겠지. 이런 데서 뭐가 나오겠어."
거구의 남자가 도훈의 어깨를 툭 밀었다.
"경찰 부를 테니까, 부모님한테 연락 가는 거 각오해."
"네, 네......."
도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끌려 나가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무사상을 향해 있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을 텐데.'
전시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까지도 도훈의 시선은 무사상의 형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쉬움이 짙게 남았지만, 지금은 살아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음이 있다. 다음에는 반드시.'
밖으로 나온 도훈은 결국 출동한 지구대 경찰에게 인계되었다. 형광등 밝은 지구대 안,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담당 경찰이 신원을 확인하는 동안 도훈은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밤늦게 걸려온 전화에, 아버지 이광수가 격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고3이 이 시간에 박물관에는 왜 들어가!"
"죄송해요, 아빠."
"수능이 세 달도 안 남았는데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담력 시험이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지, 왜 사람 놀라게 이런 짓을 해!"
전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질책. 도훈은 묵묵히 그것을 들었다.
'아버지.'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에, 도훈의 눈시울이 잠깐 뜨거워졌다. 미래에서, 흉수의 습격 이후 아버지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지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이런 잔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폐허가 된 집터 앞에서, 이미 식어버린 흔적만을 더듬으며 하루하루를 버텼었다. 살아있는 목소리로 화를 낼 수 있는 아버지가, 그때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전화기 너머, 이광수도 그 떨림을 눈치챈 듯 잠시 말이 없어졌다.
"......너 오늘따라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그냥, 아빠 목소리 들으니까 좋아서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집에 오면 얘기 좀 하자. 밥은 먹었어?"
"네, 먹었어요."
"그래. 얼른 데리러 갈 테니까 기다려."
전화를 끊은 뒤, 도훈은 지구대 벤치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오늘 얻은 도검들과 청동 방울을 앞에 늘어놓았다. 녹슬고 낡은 것들이었지만, 그 안에 깃든 기운만큼은 결코 하찮지 않았다.
'오늘은 실패했다. 무사상의 기운, 전부 얻지 못했다.'
'하지만.'
도훈의 눈빛이 다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국가특수작전부가 이 시대에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들의 눈을 피해가며 움직여야 한다.'
'저들의 계측 장비, 반응 속도, 조직력. 어느 하나 만만치 않았다. 이번엔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달빛이 방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번엔 다르다.'
'전생처럼 무력하게 당하지 않는다. 이번엔, 진짜 강자가 되어 보이겠다.'
그는 도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녹슬고 낡았지만, 그 안에 깃든 미약한 기운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손바닥에 스며드는 온기가,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모을 수 있는 모든 기운을 모아, 다시 그 자리에 서야 한다.'
결심을 굳힌 그 순간,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낯선 번호로부터 온 문자메시지였다.
도훈은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
[오늘 박물관 일, 우리 쪽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죠.]
도훈의 눈이 순간 굳었다.
'.....뭐?'
손끝에서 도검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온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번호를 어떻게.'
'누가 보낸 거지.'
화면 속 낯선 번호가, 마치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