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래를 훔쳐온 고3

3화

밤은 깊었고, 방 안은 고요했다. 도훈은 이불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청동 방울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울 표면에 닿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옜다, 조금만 더.' 숨을 고르고, 방울 속에 잠들어 있는 미미한 기운을 끌어당겼다. 실오라기보다 가는 기운이 손끝을 타고 천천히 흘러들었다. 한참 만에 눈을 떴을 때, 도훈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쌀알 한 톨.' 정말이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며 흡수한 기운이 겨우 쌀알 한 톨 만큼이었다. 단전 속에 그것이 미세하게 자리 잡는 게 느껴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이래서야 백 년이 지나도 예전의 반의 반도 못 찾을지고.' 도훈은 방울을 베개 밑에 밀어 넣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유물 하나로는 어림도 없다. 더 많은, 더 강한 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돈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도훈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졌다. 겉으로는 열여덟 소년의 얼굴이었으나, 그 속에서 굴러가는 사고는 수백 년을 산 자의 계산이었다. *** 다음 날 점심시간, 도훈은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서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구석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화면이 켜지고, 검색창에 손가락을 올렸다. '분명 이맘때였다.' 전생의 기억이라 해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수백 년을 살았다지만, 이 시대의 자잘한 사건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몇몇 파편들, 유독 인상 깊었던 사건들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부동산, 주가, 그리고—'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이거다.' 지방의 한 소형 IT 기업. 몇 달 뒤 대기업에 인수되며 주가가 수십 배로 뛰었다는 기사. 정확히 언제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회사명만큼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도훈은 종이 쪽지를 꺼내 회사명을 적었다. 글씨체가 삐뚤빼뚤한 게, 딱 고등학생이 급하게 휘갈긴 것처럼 보였다. '좋아.' '이제 현우다.' *** 매점 뒤 벤치에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무렵이라 다들 서둘러 매점에서 빵을 사 들고 교실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도훈은 그 틈을 타 현우를 불러냈다. "현우야." "어, 왜." 빵 봉지를 뜯던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너희 아버지 투자 좀 하시지?" "어, 뭐, 여기저기 조금씩 하시긴 하는데." 현우가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대답했다. 별 뜻 없이 던진 질문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회사 주식 좀 봐두시라고 말씀드려봐." 도훈이 미리 준비한 종이를 건넸다. 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종이를 받아 들었다. "뭐야, 갑자기. 너 그런 거 어떻게 알아?" "인터넷에서 봤어. 뭔가 느낌이 좋더라고." '느낌은 무슨.' 도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확신이거늘.' 전생에서 그가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이런 자잘한 정보 하나쯤 기억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 확신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현우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종이를 접었다 폈다 했다. "진짜야? 너 이런 거 잘 모르잖아." "몰라도 감이란 게 있잖아." "감으로 주식을 사냐?" "손해 봐야 몇만 원인데, 뭘 그래."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하도 태연해서, 현우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아버지한테 말이라도 해볼게. 근데." 현우가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눈을 흘겼다. "만약 진짜면, 너 나한테 크게 한턱 쏴야 돼. 진짜 크게." "쏘고말고." 도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겉으로는 친구 사이의 가벼운 농담이었다. '현우 아버지가 투자하면, 자연히 현우 집안의 자금 사정도 나아질 것이다.' '미래의 그 위기, 조금씩 늦출 수 있다.' 속으로는 이미 다음 계획이 굴러가고 있었다. 현우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훈의 마음 한구석이 살짝 뜨끔거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 며칠 뒤, 도훈은 다시 만물당을 찾았다. 가게 앞 낡은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자, 늘 나던 먼지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사장님 안 계세요?" 대답 대신, 가게 안쪽 창고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창고 문 안쪽, 낯선 남자가 상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체격이 다부지고, 팔뚝에는 오래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뭐지, 이 자는.'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넌 또 뭐냐." 남자가 도훈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목소리가 걸걸했다. "저기, 사장님 어디 계세요?" 도훈은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잠깐 나갔다. 볼일 있으면 나중에 와." 남자는 손에 든 상자를 창고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러다 뭔가 걸린 듯, 상자 뚜껑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으로 언뜻 비치는 물건에, 도훈의 눈이 멈췄다. '저건.' 녹슨 청동 검 여러 자루. 옥으로 만든 노리개. 그리고 은으로 된 장식품에는 낯익은 왕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도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선 왕릉 출토품이다.'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전생의 기억 속, 이 시기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어느 도굴 조직이 조선 시대 왕릉 여러 곳을 파헤쳐 부장품을 대거 빼돌렸다가, 훗날 형제간 분배 다툼 끝에 살인 사건으로 번지며 세상에 알려졌던 일. 그 도굴 조직의 우두머리 이름이— '허대수.' 도훈은 남자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신문 지면에서 흐릿하게 보았던 사진 속 얼굴과, 지금 눈앞의 사내가 서서히 겹쳐졌다. 코의 모양, 눈썹 위 흉터 자국까지. '맞다. 이자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흥분이 아니라, 냉정한 계산이었다. '저 상자 안의 물건들, 왕릉에서 나온 것이라면.' '오래도록 신령한 기운이 깃들어 있을 터.' '저것들이 필요하다.' 도훈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당장이라도 상자 안으로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나 지금 당장 손을 뻗을 순 없었다. 상대는 이미 살인까지 저지른 자였다. 고등학생 몸으로 무작정 덤벼들다간, 오히려 이쪽이 화를 입을 판이었다. '서두르지 말자.' '판을 짜야 한다.' 도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 네.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요." 남자는 별 의심 없이 도훈을 쳐다볼 뿐이었다. 상자를 마저 밀어 넣고는, 이내 관심을 거두고 다시 창고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훈은 조용히 가게 문을 나섰다. *** 가게를 나서며, 도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허대수, 그리고 그 형제.' '분배 다툼 끝에 살인. 그 사건이 언제였더라.'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략의 시기, 그리고 사건의 전말은 또렷했다. '그 정보를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자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밤늦게까지 방에 틀어박혀 인터넷을 뒤졌다. 허대수라는 이름과 관련된 실종 신고, 미제 사건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화면 속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던 도훈의 눈이 점점 커졌다. 몇 개의 조각난 정보들이 그의 기억과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실종된 인부의 이름, 도굴 현장 인근에서 목격된 트럭 번호, 그리고 훗날 형제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다툼의 정황까지. '이제 확신했다.' 도훈은 화면을 끄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창밖의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도훈은 청동 방울을 손에 쥔 채 오랫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달빛이 방울 표면에 닿아 은은한 빛을 뿜었다. '저 상자 안의 유물들을 손에 넣으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힘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려면.' '저자를 먼저 무릎 꿇려야 한다.' 도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순진한 고등학생의 웃음이 아니었다. 수백 년 묵은 검성의, 냉정하고도 서늘한 미소였다. 밤이 깊도록 도훈은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허대수라는 이름 아래, 몇 개의 날짜와 사건의 개요, 그리고 확인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 빼곡히 채워졌다. 펜을 놓았을 때는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이제 저자와 마주할 차례다.' 다음 날, 도훈은 다시 만물당으로 향했다. 이번엔 빈손이 아니었다. 손에는 밤새 정리한 종이 몇 장이 들려 있었다. 가게 앞에 서서, 도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나무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대수, 이제부터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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