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래를 훔쳐온 고3

2화

다음 날 아침, 도훈은 등굣길에서 곧바로 박현우를 붙잡았다. 골목 어귀,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담벼락 아래에서였다. "현우야, 부탁이 있는데." "뭔데. 갑자기 진지하게." 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도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최대한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돈 좀 빌려줄 수 있냐? 삼백만 원." "......뭐?" 현우의 걸음이 뚝 멈췄다. 삼백만 원이라니, 고3짜리 입에서 나올 액수가 아니었다. '놀라는 게 당연하지.' 도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다만, 지금은 체면 차릴 때가 아니거늘.' "뭐에 쓰려고?" "......조사할 게 있어서." 애매한 대답에 현우는 한동안 도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생의 습관대로, 거짓을 말할 때일수록 눈을 피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너 요즘 좀 이상해. 어제도 그렇고." "그런가." "뭔 일 있으면 말해. 우리 집 알잖아, 그 정도는 부모님 통장에서 빼도 티도 안 나." 현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부동산 사업으로 큰돈을 만지는 집안 출신다운 여유였다. '이 녀석은 아직 모른다.' 도훈의 눈이 잠시 어두워졌다. '몇 년 후, 이 여유가 어떻게 무너질지.' 미래의 기억 속에서, 박현우의 집안은 무리한 사업 확장 끝에 대규모 부채를 떠안았고, 그 와중에 현우 본인이 사라졌다. 실종인지, 도피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도훈은 끝내 알지 못했다. 그저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붙은 실종자 전단, 낯익은 얼굴이 흑백 사진으로 인쇄되어 있던 그 광경만이 선명했다. 그때는 이미 도훈도 남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검을 쥐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잊히지 않더구나.' 다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서늘한 죄책감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구할 수 있었는데 손을 놓아버린 듯한, 오래도록 가슴 한구석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이번엔 그렇게 안 둔다.' 도훈은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었다. '네 목숨은 내가 지킨다. 이 빚을 빌미로라도.' "됐고, 빌려줄 거야 말 거야?" 도훈이 짐짓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현우는 못 이기는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대신 나중에 나한테 다 말해줘야 돼. 알았지?" "알았어." "진짜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 "어, 알았다니까." "그리고 이거 갚을 생각도 하지 마. 어차피 나 용돈 남아돌아." 현우가 손사래를 치며 실없이 웃었다. 도훈은 그 웃음을 눈에 담았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 얼굴, 오래도록 보고 싶구나.' 그날 오후, 현우는 정말로 봉투 하나를 도훈의 손에 쥐여 주었다. 두툼한 현금 다발이었다. 봉투 겉면에는 은행 로고가 찍혀 있었고, 아직 온기가 남은 것처럼 손에 착 감겼다. "이거 진짜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거다. 부모님한테는 내가 알아서 둘러댈 테니까 걱정 마." "고맙다." 도훈은 봉투를 받아 들며 짧게 목례했다. 겉으로는 담백한 감사 인사였지만, 속으로는 무거운 무언가가 가슴 한편에 내려앉았다. '이 빚, 반드시 되갚으마. 돈이 아니라—너의 목숨으로.' 봉투를 품 안에 넣고 돌아서는 도훈의 등 뒤로, 현우가 한마디를 더 던졌다. "야, 근데 진짜 별일 없는 거지?" "없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열여덟 살짜리 소년의 몸에 수백 년 묵은 검성의 혼이 깃들어 있다는 걸, 어느 누가 믿어줄 것인가. 돈을 손에 쥔 도훈이 향한 곳은 시내 한복판의 골동품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창밖으로 스쳐 가는 낯선 풍경들—고층 건물, 신호등,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도훈은 생각을 정리했다. '영기가 사라진 시대.' 걸으면서 그는 계속 그 문제를 곱씹었다. '허나 완전히 사라졌을 리는 없다. 흔적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터.'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살았던 미래에서, 영기가 다시 세상에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은 '영기 복구'라 불리는 대사건 이후였다. 그 이전,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에는 영기가 극도로 희박했다. 하지만 완전한 무(無)는 아니었다. '고대 유물. 오래도록 신령한 기운을 품고 있던 물건들엔, 아직 잔존 영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미래에서, 도훈은 무공을 처음 배울 당시 스승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영기 복구 이전 시대에도 극소수의 은둔 수행자들이 존재했다는 이야기. 그들이 힘을 얻은 방법은 하나같이 고대 유물, 오래된 무덤에서 출토된 물건들에서 미량의 영기를 뽑아내는 것이었다고. 스승은 그때 이렇게 말했었다. '영기 없는 시대에 무공을 익힌다는 건, 마른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과 같으니라. 허나 바닥에 고인 한 방울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모아 강을 이루는 것 또한 사람의 일이지.' '전생의 토납법은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영기가 흐르지 않으니.' '하나 유물 속에 갇혀 있는 영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도훈의 발걸음이 골동품 거리의 어느 허름한 가게 앞에서 멈췄다. 간판에는 낡은 붓글씨로 '만물당(萬物堂)'이라 적혀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간판이 바람에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삐걱,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먼지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열장 안에는 고서, 놋그릇, 도자기 파편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색이 바랜 병풍이 기대어 서 있었고, 천장에는 먼지 쌓인 전구 하나가 힘없이 매달려 있었다. "뭘 찾으시나, 학생." 안쪽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백발에 돋보기안경을 낀 노인은 도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래된 청동 유물 있나요? 조선 시대나, 그 이전 것도 좋고요." "청동이라. 요즘 학생이 그런 걸 왜 찾아?" "과제 때문에요." 도훈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천진하게 웃었다. '과제는 무슨.' "허, 요즘 학교는 별걸 다 시키는구먼." 노인이 혀를 차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도훈은 그 뒷모습을 보며 진열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세월의 때가 묻어 있었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겉으로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몇 개의 물건을 꺼내 보여주었다. 놋쇠 촛대, 이 빠진 백자 그릇, 녹슨 칼날 한 조각. 대부분은 진품이 아니거나, 가치가 없는 잡물이었다. 도훈은 손끝으로 물건들을 하나씩 스쳐보았다. 전생의 감각으로 미세한 기운의 흐름을 감지하려는 시도였다. 대부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고, 무기력하고, 그저 오래된 물건일 뿐이었다. '이것도 아니고.' 촛대를 내려놓으며 도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것도.' 백자 그릇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진열장 구석에 놓인 작은 청동 방울 하나에 손이 닿는 순간— '.....!' 손끝이 저릿했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서늘하고도 낯선 기운이 방울 안쪽에서 맴돌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손끝의 온기에 반응하듯, 아주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있다. 정말로 있어.' 도훈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오랜만에 느끼는 흥분이었다. 전생, 검을 처음 쥐었을 때의 그 떨림과 닮아 있었다. "이건 얼마죠?"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도훈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거? 신라 시대 것이라 하던데, 진짜인지는 나도 모르지. 삼십만 원."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방울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를 수밖에.' 도훈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이 안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그대는 평생 알지 못할지고.' 도훈은 망설임 없이 봉투에서 돈을 꺼냈다. 지폐 세 장을 세어 건네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현우야, 미안하다. 네 돈이 이렇게 쓰이는구나.' "영수증 필요한가?" "아뇨, 괜찮아요." 방울을 손에 쥐고 가게를 나서는 도훈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겉으로는 그저 신기한 골동품을 산 학생의 얼굴. 속으로는, 수백 년 묵은 검성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미미한 기운이라도 좋다. 모으고 모으면, 언젠가—' 거리로 나선 도훈은 방울을 주머니 깊숙이 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 어스름이 골동품 거리를 물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낡은 간판들 사이로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서둘러야 한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그날 밤, 도훈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울을 앞에 두었다. 책상 위에 놓인 방울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은은한 청록빛을 띠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저 낡은 골동품에 불과했지만, 도훈의 눈에는 그 안에서 미약하게 맴도는 기운이 또렷하게 보였다.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전생의 토납법을 최대한 변형하여, 방울 속에 갇힌 미세한 기운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그나마 남은 기운마저 놓칠 것 같았다. 미세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주, 아주 느리게. 마치 마른 논에 물 한 방울이 스며드는 것처럼, 그 속도는 답답할 만큼 더뎠다. 하지만 분명 스며들고 있었다. 도훈은 이를 악물고 그 미미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것이 시작이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첫 걸음이니, 결코 헛되지 않을지고.'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는 것을, 옆방에서 자고 있던 그의 어머니도, 지나가던 고양이도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방울을 감싸 쥔 도훈의 손끝에서, 아주 희미한 청록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만은—어둠 속에서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조용히 번져가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