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한부라서, 일단 최강 찍었습니다

1화

정기종 대전(大殿) 한복판에 놓인 청석단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나는 내 이름이 백운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곱씹고 있었다. 구름 운(雲)에 날 비(飛), 풀어놓고 보면 구름 위를 나는 자라는 뜻인데, 정작 내 인생은 구름 한 점 없이 땅바닥에 처박히기만 했다는 게 문제였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조짐이 보였으니까. 전생이라는 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서른둘, 야근에 절어 죽은 회사원의 기억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자각한 건 바로 이 순간, 강장로가 내 정수리에 손을 올리고 근기를 개방하는 의식을 시작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뭔가 뜨거운 게 뒤통수부터 흘러들었고, 나는 그것을 따라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는 백운비로 살아온 열아홉 해의 기억과 회사원으로 죽은 서른두 해의 기억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뒤섞여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뒤섞임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사수에게 욕먹던 기억이, 다른 쪽에서는 검을 처음 쥐던 여섯 살 적 기억이 동시에 떠오르는데, 이게 사람 정신머리를 반으로 쪼개놓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다행인 건, 두 기억이 충돌하지 않고 그냥 나란히 앉아있는다는 점이었다. 서른두 해와 열아홉 해를 합치면 쉰한 해쯤, 인생 두 번 산 셈 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는데, 그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강장로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운비야, 지금부터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한다" 하고 강장로가 낮게 말했는데, 그 목소리가 유난히 떨리고 있어서 나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원래 이 의식은 간단해야 했다. 부친 백월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로 공석이 된 정기종 종주 자리를, 그의 유일한 아들인 내가 근기 개방식을 통해 정식으로 승계받는 절차였으니까. 근기라는 건 말 그대로 몸 안에 잠들어 있는 무공의 근본, 씨앗 같은 것이었는데, 이걸 개방하면 그날부터 정식으로 비책법을 익힐 자격이 생긴다고 했다. 요컨대 성인식이자 즉위식을 겸한 자리였다. 대전 안을 가득 채운 원로들과 제자들도 다들 그런 마음가짐으로 앉아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종주가 탄생하는 경사스러운 날이라고, 다들 그렇게 믿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 몸속에서 근기가 개방되는 순간, 그것이 뒤틀리듯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우두둑... 그 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는지 밖에서 들렸는지도 헷갈릴 만큼, 나는 순간 척추가 통째로 얼음물에 담긴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강장로의 손끝에서 흘러들던 기운이 내 단전 어딘가에서 부딪히며 산산이 흩어지는 게 느껴졌고,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지 않았다. 마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 같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정확히는 모래알이 흐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손안에 있던 모래주머니 자체가 밑바닥부터 찢어져서 새어나가는 감각이었다.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이게... 무슨" 하고 강장로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그 순간 내 시야 한켠에 낯선 문구가 떠올랐는데, 그건 분명히 전생에서 본 적도 없는 형태의 글자였다. 대괄호로 감싸인, 마치 알림창 같은 그 문구를 나는 반사적으로 눈으로 좇았다. [근기 붕괴가 감지되었습니다.] [현재 진행률: 4%] '...이건 또 뭐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보다 먼저 내 몸이 반응했다. 명치 아래에서 뜨거운 통증이 치솟았고, 나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질 뻔했다가 겨우 두 손으로 청석단을 짚어 버텼다. 손바닥에 닿은 청석단의 냉기가 그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강장로가 다급히 나를 부축했고, 대전 안에 앉아 있던 원로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낮은 동요가 번졌다. "종주께서 근기 개방에 실패하셨다는 게, 그게 사실입니까" 하고 누군가 물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놀라움보다는 어딘가 고소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임장로가 급히 다가와 내 맥을 짚었고,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가는 걸 나는 코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임장로는 원래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의 눈썹이 그렇게까지 일그러진다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의 손끝이 내 손목을 짚은 채로 몇 번이나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하는 걸 보면서, 나는 뭔가 그가 계속 자신의 진맥 결과를 부정하려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답인 걸 알면서도 답안지를 다시 채점하는 사람처럼. "근기가... 개방되는 게 아니라 무너지고 있습니다" 라고 임장로가 강장로에게 낮게 속삭였지만, 대전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그 말은 앞줄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무너지고 있다. 그 세 글자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전생에서 나는 회사에서 실적이 무너지는 걸 봤고, 건강검진 결과가 무너지는 걸 봤고, 결국 몸 자체가 무너지는 걸 겪으며 죽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아예 존재의 근본이라는 게 무너진다니, 이건 뭔가 억울할 정도로 일관된 팔자였다. 두 번의 삶을 살아도 무너지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도 판단이 안 섰다. 정기종 종주라는 자리가, 알고 보니 근기 붕괴 시한부 환자 자리였다는 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나조차도 이 상황이 실감이 안 나서, 통증 속에서도 머릿속 한 켠은 이상하게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전 안이 소란해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시야에 다시 떠오른 문구를 읽었다. [경고: 근기 붕괴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예상 완전 붕괴까지 남은 기간: 약 100일] 백일.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전생에서는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는 사람들 이야기를 남의 일처럼 들었는데, 이번엔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무공의 세계에서, 근기라는 걸로.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백 일이면 대략 세 달 남짓, 계절이 하나 바뀌는 정도의 시간. 그 안에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애초에 근기 붕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책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웃긴 소리였다. "운비야,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하고 강장로가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반대로 머릿속이 이상하게 맑아지는 걸 느꼈다. 근기가 무너진다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100일이라는 시한이 정확히 무슨 근거로 산출된 숫자인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했다. 이 순간부터 나는 정기종의 종주이자 시한부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직함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는 것. 명함을 판다면 앞면엔 종주, 뒷면엔 100일짜리 유효기간이라도 적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이 상황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웠다. 대전 뒤쪽에서 누군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애써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코웃음의 주인이 정기종 제1제자 강호진이라는 걸,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연체8중에 오른 천재라는 이름값이 그의 목소리에까지 배어 있었으니까. 그와 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이야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었지만, 이런 순간에까지 그 코웃음을 들어야 한다는 게 새삼스레 짜증이 났다. 종주 자리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웃음거리가 된 셈이니, 앞으로의 정기종 생활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예고편을 미리 보는 기분이었다. 원로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하고 탄식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종주 자리를 다시 논의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낮게 흘렸는데, 그 말이 내 귀에까지 닿았다는 걸 그 사람도 알고 있었을 텐데도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이 대전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나를 향한 동정과 경멸이 반씩 섞인 무언가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나는 무릎 꿇은 채로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도위엄 - 접속을 준비 중입니다.] 그 문구가 시야 정중앙에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사도위엄?' 나는 그 낯선 이름을 눈으로 읊어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근기 붕괴라는 것도 이해 못 하고 있는 판국에, 이번엔 또 다른 낯선 개념이 튀어나온 셈이었다. 이름만 보면 뭔가 거창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이비 종교 이름 같기도 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다만 확실한 건, 이 문구가 뜬 이후로 강장로와 임장로의 목소리가 갑자기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대전 안의 모든 소리가 뭉개져 들려왔다. 강장로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려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그 소리는 내 귀에까지 닿기 전에 물속 저편으로 사라져버렸고, 원로들의 웅성거림도, 강호진의 코웃음도, 전부 하나의 뭉근한 배경음으로 뭉쳐져 사라졌다. 오직 내 심장 박동 소리만이 유일하게 선명했는데, 그 박동조차 평소보다 느리게, 마치 누군가 일부러 재생 속도를 늦춘 것처럼 둔중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나는 뭔가가 내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듬직하고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은 마치 얼음 조각 하나가 명치 한복판에 툭 떨어져, 서서히 온몸의 혈관을 따라 번져나가는 것 같았는데, 차갑다기보다는 낯설다는 느낌이 더 컸다. 이질적인 무언가가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걸, 나는 몸으로 먼저 알아챘다. 근기가 무너지는 그 폐허 위에, 뭔가 다른 것이 슬그머니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이게 구원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인지, 백일이라는 시한을 받은 처지에 판단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이 순간부터 내 인생은 다시 한번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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