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억만장자 복수극

4화

정비 문제는 결국 이틀 만에 해결됐지만, 나는 그 이틀 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렌트 업체에 하루 두 번씩 전화를 걸었다. 오전에는 진행 상황을 확인하려고, 오후에는 혹시 대체 차량으로 바뀌지 않았는지 재확인하려고. 담당 직원은 매번 똑같은 톤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고객님"이라고 답했는데, 그 사무적인 말투가 오히려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조급해지면 별것 아닌 어미 하나에도 온갖 의미를 갖다 붙이게 된다는 걸, 나는 그 이틀 동안 새삼 깨달았다. 결국 대체 차량이 아닌 원래 예약했던 그 롤스로이스 팬텀이 다시 배정됐다는 확답을 받았을 때, 나는 안도감보다는 허탈함을 먼저 느꼈다.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팬텀 한 대 렌트비가 하루에 얼마인지, 그 돈이 내 한 달 월급의 몇 배인지, 그런 계산이 습관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정도로 조바심을 낼 만큼, 내가 이 유치한 복수극에 진심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니 부끄러웠다. 매장에서 삼 년 가까이 계약서와 씨름하며 살아온 내가, 서지아 한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차 한 대를 그렇게까지 사수하려 든다는 게. 하지만 부끄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끄러움보다 더 크게 자리 잡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을 다듬는 사이 하나 더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박태호. 그를 알게 된 건 이 년 전, 대리점에 새로 부임한 지역 감사원이 지역 상인들을 상대로 벌인 사기 사건 때문이었다. 감사원이라는 직함을 앞세워 소액 투자를 유도하고, 계약서에 작은 글자로 숨겨둔 조항으로 돈을 가로채는 방식이었다. 겉으로 보면 그냥 지분 투자 계약서였다. 수익률과 배당 조건이 큰 글자로 적혀 있어서 대부분은 그 아래, 여섯 포인트도 안 되는 크기로 인쇄된 "위약 시 원금의 삼 배 배상"이라는 조항을 놓치기 쉬웠다. 나는 대리점 손님으로 온 박태호의 계약서를 우연히 살펴보다가 그 함정을 발견했다. 매장 대리점에서 일 년 넘게 일하며 계약서의 문법을 몸으로 배운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폰트 크기가 작아질수록 위험 조항이 숨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건, 나만 아는 감사원 관련 지식이었다. 이 대리점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이거 서명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그때 그렇게 말했다. 박태호는 이미 서명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내 말 한마디에 펜을 내려놓았다. "뭐가 문제고?" 그가 물었다. 나는 조항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삼 배 배상이라는 문구를 확인한 박태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그 계약서에 서명했으면 그는 투자금의 세 배를 물어줄 뻔했다. 그날 이후 박태호는 나를 특별하게 대했다. 지방 대도시에서 대형 휴대폰 종합 매장 몇 곳에 투자하고 있던 그였고,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그는 종종 나를 불러 저녁을 사줬다. 삼겹살집이나 국밥집처럼 딱히 격식 없는 곳들이었는데, 그는 늘 자리에 앉으면 소주를 먼저 시켰다. "태현이 너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가 술잔을 채우며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반박하고 싶었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게 아니라 계약서 보는 눈이 있는 거라고. 사람은, 서지아라는 증거가 있듯이, 나는 전혀 보지 못했다. 토요일 전날 밤, 나는 박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쯤 울리고 그가 받았다. 뒤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형님, 저 부탁이 좀 있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세한 계획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며칠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정이 있다고만 했고, 이백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냐." 박태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텔레비전 소리가 줄어드는 게 들렸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는 모양이었다. "그냥, 개인적인 일이에요." 나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이 유치한 복수극을 은인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강 인베스트먼트 그룹이니 롤스로이스니 하는 말을 이 사람 앞에서 꺼내는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스스로 다시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알겠다." 박태호는 더 묻지 않았다. "계좌 불러줘라." 나는 계좌번호를 불렀고, 그는 받아 적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신뢰가 목구멍 안쪽을 뜨겁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서지아에게 배신당한 지 며칠 만에 나에게는 이상한 위로가 됐다. 사람을 믿는다는 게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삼 년을 함께 지낸 여자에게도 이런 무조건적인 믿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나중에 꼭 갚을게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됐다. 대신 요즘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라. 너 그렇게 혼자 끌어안고 사는 거,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박태호가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진심을 알아채는 순간 나는 왜 서지아의 말에서는 그런 진심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지를 곱씹었다. 삼 년을 사귀었는데도 느껴보지 못한 진심을, 몇 번의 저녁 식사만으로 알게 된 사람에게서 느낀다는 게 씁쓸했다. 계산이 맞지 않았다. 시간을 투자한 만큼 신뢰가 쌓여야 정상인데, 내 인생의 셈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이백만 원이 다음 날 오전 계좌에 들어왔다. 통장 잔고는 다시 안전선을 넘겼다. 나는 그 문자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조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토요일, 나는 윤하나와 최종 리허설을 진행했다. 장소는 그녀가 지정한 청담동의 조용한 카페였다. 그녀는 이번에도 완벽했다. 정장 재킷 하나만 갈아입었을 뿐인데, 어제 만났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풍겼다. "제 이름은 미아 윤이라고 해주세요, 한국에서는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그녀가 설정을 제안했고, 나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업체 이름은 뭐로 할까요." 그녀가 물었다. 손에 든 아이패드에 뭔가를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강 인베스트먼트 그룹." "좋네요. 심플하고 진짜 같아요." 그녀가 웃었다. "명함도 그렇게 파둘까요? 종이 질감까지 신경 쓰면 훨씬 그럴듯해요." "거기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말했다. 그녀는 어깨를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그럼 대화 시나리오 다시 확인해요. 서지아 씨가 먼저 알아볼 가능성이 있죠?" 그녀가 물었다. "높아요. 삼 년을 사귄 사람인데." 나는 대답했다. 그 말을 하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해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럼 제가 먼저 선수 쳐서 인사하는 게 낫겠네요. 어색해질 틈을 안 주는 거죠." 윤하나가 말했다. 그녀의 이런 순발력이, 이 배역을 완성시키는 가장 큰 무기라는 걸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박덕수와도 마지막 점검을 했다. 전화로 연결된 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낮고 안정적이었다. 그는 이미 번호판 문제를 해결해뒀다고 확인해줬다. "내일 오전 열 시에 청담동 쪽으로 오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동선은 미리 파악해두시고요." 동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서지아가 자주 가는 카페, 그 카페에서 김도윤과 만나기로 한 시간, 그리고 나는 그 시간에 정확히 그곳에 도착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서지아의 SNS에 이미 그날 그 카페에서 만난다는 힌트가 올라와 있었으니, 동선을 짜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게시물에는 카페 이름도, 시간대를 짐작할 수 있는 조명 각도도 그대로 찍혀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정보를 흘리고 있는지 모른 채 산다. 나는 그 무지를 이용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가끔은 불편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형광등 불빛이 눈에 스며들 듯 아렸다. 내일이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롤스로이스, 비서, 기사, 그리고 나. 완벽한 각본이었다. 유일한 변수는 서지아와 김도윤이 이 각본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였는데, 그 변수를 컨트롤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 불확실성을 몇 번이고 계산해봤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변수에는 정확한 함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더 이상 대리점 직원이 아니라, 강 인베스트먼트 그룹의 대표가 될 것이었다. 그 사실이 실감 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심장 박동 하나하나가 손끝까지 저릿하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새벽 세 시쯤, 휴대폰이 울렸다. 서지아였다. 나는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화면 위로 이름 세 글자가 떠 있는 걸 그냥 지켜봤다. 벨소리가 다섯 번쯤 울리다 끊겼다. 그런데 이번엔 문자가 하나 따라왔다. "오빠, 나 잘 지내는지 모르겠어. 미안해." 나는 그 문자를 오래 들여다봤다. 미안하다는 말이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지만, 그 다름이 진짜인지 내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이 문장 하나에 밤새 답장을 고민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화면을 보며, 이 문자가 내 계획에 어떤 변수를 더할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내일 열 시, 청담동. 서지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올린 사진 한 장이, 내가 짜놓은 각본의 시작점이 됐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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