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억만장자 복수극

1화

생일이었다. 한 달 내내 잔업까지 붙잡고 모은 돈으로 예약한 레스토랑은, 강남대로 뒷골목의 이탤리언 레스토랑이었고, 코스당 팔만 원짜리 메뉴를 두 개 시키면 내 통장에서 십육만 원이 빠져나간다는 계산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거기에 와인 한 병을 곁들이면 이만 오천 원이 추가되고, 서비스 차지 십 퍼센트를 더하면 총액은 이십만 원을 넘는다는 것도, 예약 전화를 걸던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는 순간에도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숫자가 굴러가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 휴대폰 대리점에서 삼 년째 일하다 보면 이런 계산 습관은 병처럼 몸에 붙는다. 손님이 들어오는 순간 그 사람의 가방과 신발과 시계를 스캔하듯 훑고, 대략적인 총액을 뽑아내는 게 반사적으로 이루어진다. 처음엔 직업병이라고 웃어넘겼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도 그 스캐너가 멈추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게 문제라는 것도, 그날 이후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서지아는 이십 분이나 늦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을 먼저 봤다. 샤넬이었다. 클래식 플랩, 캐비어 스킨, 골드 체인. 대리점에서 매일 명품 케이스를 파는 나였기에 진품과 이미테이션을 구분하는 눈은 자연스럽게 붙어 있었고, 저건 진품이었다. 스티치 간격, 체인의 무게감, 로고 각인의 깊이까지 눈에 들어왔다. 시가로 대략 칠백만 원. 내 두 달치 월급이 그녀의 어깨에 걸려 있는 셈이었는데,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게 누구의 선물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오빠, 나 이거 어때?" 그녀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내게 자랑하고 싶은 티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게 이상했다. 자랑할 마음도 없이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건, 이미 그 가방이 그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물건이 되어버렸다는 뜻이었으니까. 처음 명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반드시 자랑을 한다. 그 절차를 건너뛰고 곧바로 무심해질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런 물건을 여러 번 받아본 사람뿐이다. 서지아를 만난 건 삼 년 전, 대리점에 휴대폰을 개통하러 온 손님으로였다. 그때 그녀는 이십만 원짜리 요금제 앞에서 십 원 단위까지 따져 묻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꼼꼼함이 마음에 들었다.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가서비스 몇 개가 필요 없는지, 데이터 이월이 몇 기가까지 되는지, 위약금이 정확히 얼마인지, 하나하나 메모까지 하면서 물어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이 사람과는 말이 통하겠다고 생각했다. 숫자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 그게 그때의 내가 매력을 느낀 이유였다. 삼 년이 지나는 사이 그 꼼꼼함은 어느새 사라졌고, 대신 남의 계산을 대신 치르게 만드는 재주만 남았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처음엔 내가 사주는 커피 한 잔이었고, 다음엔 생일 선물이었고, 그다음엔 여행이었다. 매번 조금씩 커지는 지출의 곡선을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사랑에는 값이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번 달 실적 잘 나왔어?" 그녀가 물었다. 관심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이번 달에도 내 통장이 얇을지, 두터울지를 재는 질문이었다는 걸 나는 목소리의 톤 하나로 알아챘다. 그녀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물었다. 오빠 요즘 힘들어? 가 아니라 오빠 실적 어때, 였고, 그 차이를 나는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괜찮게 나왔어." 나는 대충 대답했다. 실제로는 목표치의 팔십삼 퍼센트였다. 인센티브가 통상보다 십오만 원쯤 덜 붙는 숫자였는데, 그런 걸 자랑할 이유는 없었다. 이번 달엔 회전율이 낮은 매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손님 자체가 줄었고, 그 탓을 나는 그녀에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설명해도 그녀는 관심 없을 게 뻔했다. 와인이 나오고, 파스타가 나오고, 그녀는 휴대폰을 두 번 확인했다. 액정이 밝아질 때마다 나는 발신자 이름을 훔쳐보려 했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화면을 가슴 쪽으로 돌렸다. 그 능숙함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손목을 꺾는 각도, 화면을 가리는 속도, 그 모든 동작에 어색함이 하나도 없었다. 연습된 동작이었다. 메인 요리가 나오는 사이, 그녀는 와인을 두 잔째 비웠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였다. 취기가 오른 게 아니라, 뭔가를 미루고 있는 사람의 리듬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삼 년을 함께 있으면 상대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그것을 미루는 순간의 패턴까지 읽히게 된다. 술을 빨리 마시고, 접시 위의 파스타를 포크로 자꾸 뒤적이며 실제로는 입에 넣지 않는 것. 그게 그녀가 할 말이 있을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오빠, 나 할 말 있어." 그녀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 순간 목구멍 안쪽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삼 년을 사귀면 상대의 표정 하나로도 다음 문장을 예측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예측이 맞아떨어질까 봐 겁이 나는 그런 순간이 있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았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책감의 총량이 소진되어버렸다는 뜻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녀는 이미 이 순간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연습해본 사람처럼 문장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왜?" 나는 겨우 그 한마디를 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빠는... 노력을 안 하잖아." 그녀가 눈을 피하며 말했다. "나는 이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노력. 그 단어가 목에 걸렸다. 나는 매달 이백삼십만 원 남짓한 월급에서 팔십만 원을 저축하고, 나머지로 그녀와의 데이트비와 생활비를 쪼개 쓰던 사람이었다. 저축을 늘리려고 담배도 끊었고, 회식 자리도 웬만하면 빠졌고, 주말에도 특근을 자원했다. 그게 노력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노력인지 나는 되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노력을 안 한다는 말은, 노력의 방향이 그녀가 원하는 쪽이 아니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도윤 오빠는 이번에 임원 됐대." 그녀가 덧붙였다. 그 순간 이름이 나왔다. 김도윤. 회사 마케팅팀 신입인 줄만 알았던 남자, BMW 5시리즈를 몰고 다니는 남자. 나는 대리점에서 그의 회사 법인폰을 개통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연봉 정보란에 찍혀 있던 숫자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계약서에 적힌 연봉은 내 것의 세 배가 넘었고, 법인카드 한도는 내 통장 잔고보다 높았다. 그 숫자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다른 세계의 데이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몇 달 됐어?" 나는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몸이 먼저 계산을 시작한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그 시작점을 알아야 지난 몇 달간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계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그녀는 대답을 피했다. 그 회피가 대답이었다. 몇 달이 아니라 이미 오래됐다는 뜻이었고, 그 가방도 이번 달에 처음 받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지난달 그녀가 갑자기 야근이 많아졌다고 했던 그날들, 주말에 친구 결혼식이 있다고 했던 그날들이 전부 그 이름과 연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레스토랑 창밖으로 BMW 한 대가 지나갔다. 서지아의 눈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짧은 시선의 이동이, 지난 몇 달간 그녀가 몰래 쌓아온 모든 감정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눈동자가 움직인 시간은 채 일 초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일 초 안에서 삼 년의 관계가 이미 끝나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미안해, 오빠." 그녀가 말했다. 그 미안하다는 말에는 미안함이 한 톨도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챘고, 그 앎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는 걸 동시에 깨달았다. 알아도 소용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걸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작에도 미련이라곤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회의가 끝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는 사람처럼 담백했다. 계산은 내가 했다. 십육만 원. 거기에 와인 값과 서비스 차지까지 더해 이십만 팔천 원. 그 숫자가 카드 영수증에 찍혀 나올 때,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웃지 않았다. 지난 삼 년간 내가 그녀에게 쓴 돈을 전부 더하면 얼마가 나올지,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뻔했다. 계산할 수 있는 건 셈이 되는 것들뿐이었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은 어떤 계산기로도 셈이 되지 않았다. 레스토랑을 나서는 그녀의 등을 보며, 나는 손끝이 저릿한 걸 느꼈다. 삼 년치 계산이 한순간에 마이너스로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발신 총액은 있지만 수신 총액은 처음부터 없었던, 그런 장부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창밖에 서 있는 검은 세단 한 대를 봤다. 김도윤의 것이었다. 매끈한 라디에이터 그릴과 낮게 깔린 차체, 유리창에 반사되는 가로등 불빛까지 눈에 익었다. 그가 벌써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이다. 어쩌면 이 저녁 식사가 끝나는 시각까지도 그는 미리 계산해두고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지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리 너머로 둔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방금까지 십육만 원짜리 계산서를 손에 쥐고 있던 손이 텅 비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