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림자는 눈보라 속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췄다.
처음엔 그냥 눈 더미가 움직이는 줄 알았다. 바람이 워낙 거세서 눈이 뭉쳐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그 형체가 점점 커지면서, 나는 그게 살아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집채만 한 백색 곰이었다.
어깨 높이만 해도 사람 셋을 세워놓은 것과 맞먹었고, 발톱은 검처럼 길고 검게 빛났다. 그 눈은 왕급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만큼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눈보라 속에서도 하얗게 얼어붙는 게 보였다.
크아아아아아!
포효가 눈밭을 흔들었다. 나는 그 소리에 실제로 눈밭 표면이 진동하는 걸 느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떨림이 무릎까지 전해졌고, 귓속이 먹먹해질 정도의 압력이 뒤따랐다.
이게 왕급이라는 건가.
빙아랑 여덟 마리를 상대할 때랑은 확실히 무게가 달랐다. 그때는 숫자로 밀어붙이는 느낌이었는데, 이건 한 마리 자체가 만들어내는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흩어져!"
도륵이 소리쳤다. 여섯 명의 전사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며 창을 겨눴다. 훈련된 움직임이었지만, 그 움직임 사이에 두려움이 명백히 섞여 있었다. 창을 쥔 손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몇몇은 이미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백강웅의 앞발이 눈밭을 후려쳤다.
콰앙!
가장 가까이 있던 전사 하나가 그 충격파에 그대로 튕겨나갔다. 다행히 정면으로 맞은 건 아니었지만, 눈밭에 처박히며 신음을 흘렸다. 튕겨나간 방향으로 눈보라가 부채꼴로 퍼져나갔다.
"쳐, 다리를!"
도륵이 외치며 도끼를 던졌다. 백강웅의 뒷다리에 도끼가 박혔지만, 짐승은 신음 한 번 없이 몸을 틀어 도륵을 노렸다. 도끼가 박힌 자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는데, 그 색이 검붉다기보다는 거의 흑색에 가까웠다. 저게 정상적인 짐승의 피인가 싶을 정도로.
[여기서 내가 개입해야 하나.]
원래 세계에서 얻은 습관이 그랬다. 위험한 순간엔 재보다 먼저 몸이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엔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부족 사람들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힘을 보여야 하나.
이미 빙아랑 여덟 마리를 손으로 찢은 전과가 있어서 지금 와서 힘을 숨기는 건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게 움직이고 싶진 않았다. 지금 도륵의 눈빛만 봐도 이미 나를 뭔가 이상한 존재로 보고 있는 게 느껴지는데, 여기서 더 튀는 짓을 했다간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나를 두고 회의를 열지도 모른다.
그런데.
백강웅의 앞발이 도륵을 향해 떨어졌다.
나는 뛰었다.
생각이 몸보다 늦었다. 발이 먼저 눈밭을 박차고 나갔고, 머릿속에서는 그제야 '아, 지금 뛰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도륵과 앞발 사이에 정확히 끼어들었다. 손을 뻗어 앞발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힘으로 막은 게 아니라, 방향을 흐르듯 바꾼 것이었다. 물이 돌을 만나 옆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손바닥에 전해지는 압력은 상당했지만, 그 압력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옆으로 흘려보내는 순간, 마치 거대한 파도의 결을 손끝으로 읽어낸 것 같은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앞발이 나를 지나쳐 옆의 눈더미를 후려쳤다.
펑!
눈더미가 폭발하듯 흩어졌다. 흩날린 눈 조각들이 잠시 허공에 떠 있다가 눈보라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걸, 나는 이상하게도 선명히 지켜보고 있었다.
"뭐, 뭐야."
도륵이 눈을 부릅뜨며 나를 봤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과 백강웅의 앞발이 지나간 자리를 번갈아 오갔다.
나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백강웅이 다시 몸을 틀어 이번엔 나를 노렸다. 거대한 몸통이 통째로 밀려왔다. 그 몸이 만들어내는 바람이 얼굴을 후려쳤고, 콧속으로 짐승 특유의 비린 냄새가 확 밀려들었다.
[여기서 정면으로 맞으면 아마 마을 전체가 나를 요괴로 확정할 텐데.]
아니, 정면으로 맞았다간 요괴로 확정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눈밭에 파묻혀 죽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몸을 비틀었다. 오른발을 축으로 반 회전, 왼손으로 짐승의 옆구리를 슬쩍 밀었다. 힘으로 밀어낸 게 아니라, 짐승 자신의 무게와 관성을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었다. 손바닥에 닿는 짐승의 털은 억세면서도 뜨거웠고, 그 밑으로 근육이 요동치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백강웅의 거체가 그대로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갔다.
쿠구궁!
땅이 흔들렸다. 발밑으로 전해지는 진동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다른 전사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창을 던졌다. 창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짧게 이어졌고, 백강웅의 목덜미에 창 세 개가 박혔다. 짐승이 다시 일어나려 몸부림쳤다. 눈밭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그 몸부림의 힘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이번엔 도륵이 도끼를 들고 뛰어들었다.
"지금이다!"
도끼가 짐승의 목을 정확히 갈랐다.
크르르르르···.
백강웅의 몸이 서서히 눈밭 위로 쓰러졌다. 거대한 몸이 만드는 진동이 발밑으로 전해졌다. 쓰러지는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도 느리게 느껴졌는데, 마치 거대한 산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눈보라 소리만 귓가에 남았다. 쉬이이이, 하는 바람 소리가 백강웅의 사체 위로 쌓이는 눈발과 함께 낮게 깔렸다.
먼저 입을 연 건 도륵이었다.
"당신, 방금 그 동작···."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빛이 방금 전까지의 시비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힘으로 막은 게 아니었지. 그건 흐르듯··· 방향을 바꾼 거였어."
"그런가요."
[네, 맞습니다만 왜 그렇게 얼굴이 하얘지셨나요.]
도륵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가 뒷걸음질을 치듯 반걸음 물러섰다. 그 반걸음이 마치 아주 큰 결심이 필요한 동작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찬의 몸짓이 그랬다고 했다. 부딪히지 않고, 흐르듯이 상대의 힘을 되돌려주는 방식. 오금족의 무공엔 그런 게 없다. 우린 다 힘으로 부딪히니까."
다른 전사들도 하나둘 나를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 나를 애송이로 취급하던 시선들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두려움과 경외가 섞인, 그런 눈빛이었다.
그중 한 명은 창을 쥔 손에 힘을 잃은 듯 창끝을 슬쩍 땅으로 내렸고, 또 다른 하나는 아예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 함께 짐승과 싸운 동료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검은 눈···."
누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흉터 없는 몸···."
또 누군가 이어 말했다.
"흐르는 몸짓···."
세 마디가 마치 무슨 주문처럼 순서대로 이어졌다. 나는 그게 뭘 뜻하는 건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도륵이 무너진 백강웅의 시체 옆에서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발을 내려놓기 전에 한 번 멈추는 그런 걸음.
"당신, 정말로···."
그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그 미완의 문장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아니, 잠깐만요, 저 그냥 사람인데요.]
라고 속으로 소리쳤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봐도,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본 사람들에게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눈보라가 잦아든 하늘 아래, 여섯 명의 전사들이 하나같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한 방향으로 모이는 게, 마치 화살촉이 겨눠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진 이름이 '장무적'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백강웅의 사체 위로 눈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검붉다 못해 흑색에 가까운 피가 서서히 눈에 덮여가고 있었고, 그 위로 쌓이는 흰 눈이 이상하게도 고요하게 느껴졌다.
전사 하나가 넘어져 있던 동료를 부축해 일으켰다. 부축받은 전사는 신음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발 사이로, 도륵이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한마디가 유독 선명하게 남았다.
"마을로 돌아가면··· 지족장께 보고해야 한다.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보고해야 한다는 게, 좋은 쪽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이미 얼굴빛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