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삼 일 앞으로 다가온 시험을 대비해, 제천궁은 오늘 저녁 각지에서 온 참가자들을 위한 상견례 자리를 마련했다.
대전 옆 별당인 영빈각(迎賓閣)은 평소라면 조용히 비어 있을 공간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청람대륙 각지의 문파와 성읍에서 보낸 자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등불이 사방 기둥마다 걸려 방 안을 은은하게 밝혔고, 그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걸린 그림자들도 함께 일렁였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침향(沈香)의 은은한 냄새가 격식과 긴장을 동시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화려한 비단 방석이 줄지어 놓였고, 그 위에 앉은 자들의 옷차림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출신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한도현은 임설화와 함께 방 한쪽 구석, 기둥 뒤편 그늘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는 일부러 그런 자리를 골랐다.
'눈에 띄지 않는 자는 조사되지 않는다.'
스승의 말이 그의 걸음마다 새겨져 있었다.
"저기 좀 보세요."
임설화가 낮게 속삭이며 눈짓으로 방 입구를 가리켰다.
입구에서 한 청년이 들어서고 있었다.
흰 옷을 걸친 그의 피부는 유난히 희었고, 그 위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반듯한 콧날이 등불 아래 도드라졌다.
옷깃에는 은실로 성문(城紋)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 자수 하나마다 값비싼 공임이 들어갔을 것이 짐작되었다.
걸음걸이마저도 어딘가 계산된 듯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발끝을 내딛는 속도, 시선을 돌리는 각도, 모든 것이 마치 오래도록 연습해 온 동작 같았다.
"조휘랑이에요."
임설화가 말했다.
"진양성 성주의 아들이라던 그 사람."
한도현은 조휘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나직한 수런거림이 일었다.
"조휘랑 공자시군요."
"진양성에서 문리 수좌를 다투는 자라던데."
"학사원 시절부터 이름이 높았다지."
조휘랑은 그런 반응들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는 좌중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그 절도 있는 동작 하나에도 사람들은 감탄한 듯 눈을 빛냈다.
영빈각에는 이번 시험에 참가하는 각지의 자제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청허문(淸虛門)에서 온 여도사 하나는 조용한 눈빛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그 절제된 자세가 이미 오랜 수행의 흔적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좌우로 흔들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과 달리, 시종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이 소란스러운 자리 자체가 수행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북방 한설관(寒雪觀)의 젊은 검수는 술수보다 무공에 관심이 큰 듯, 시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의 허리에 걸린 검집은 장식 하나 없이 소박했지만, 손잡이 부분만은 유난히 닳아 있어 얼마나 자주 검을 뽑았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동쪽 해안 지역에서 온 상인 가문의 자제는 연회석 음식에만 관심을 두는 듯 연신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옆자리 사람에게 이 요리는 어느 지방 것이냐, 저 술은 어느 해에 담근 것이냐 묻는 것으로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각기 다른 문파와 가문에서 왔으나, 이들 모두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같은 목표를 향한 경쟁자였다.
그 사실이 방 안의 공기를 은근히 팽팽하게 만들고 있었다.
겉으로는 담소를 나누는 척했지만, 서로를 곁눈질로 재는 시선들이 끊이지 않았다.
조휘랑은 그 무리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자세를 고쳐 앉거나, 잔을 든 손을 멈추고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도현에게 닿았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한도현을 살펴보았다.
검은 피부에 수수한 옷차림.
그 어떤 문파의 표식도 화려하게 걸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었다.
조휘랑의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한 차례 움직였다.
그 시선의 궤적에는 이미 결론이 정해진 듯한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그쪽은 처음 보는 얼굴이군."
조휘랑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제천궁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한도현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한도현이라 합니다."
"한도현이라."
조휘랑이 그 이름을 되뇌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제천궁의 제1대 제자라면, 백현도 도사님 밑에서 수학한 자인가."
"그렇습니다."
"흐음."
조휘랑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라 하기엔 부족했고, 그렇다고 순수한 호기심이라 하기에도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제천궁의 이름값에 비해, 그 제자는 다소 초라해 보이는군."
임설화가 그 말에 발끈하여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한도현이 슬쩍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이 한도현의 눈에 보였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한도현이 담담히 답했다.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초심자에 불과합니다."
조휘랑은 그 대답에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개 이런 자리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자들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원래의 무심한 자리로 돌아왔다.
"겸손하군."
조휘랑이 말했다.
"제천궁의 제자답게 예법은 갖춘 모양이야."
그 말투에는 여전히 우월감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한도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마치 그와의 대화 자체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한도현이 그저 겸양의 예를 표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조휘랑은 그렇게 단정 짓고 있었다.
'초심자라 함이 옳겠지.'
조휘랑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표식조차 화려하지 않은, 별다른 배경도 없어 보이는 이 소년이 자신과 경쟁이 될 리 없다고,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진양성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이긴 것이라 여기는 눈치였다.
"이번 시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시길 바라겠습니다."
한도현이 다시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지."
조휘랑이 여유롭게 답하며 자리를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던 시선들이 자연스레 다음 인물을 향해 옮겨갔고, 방 안의 소란은 다시 원래의 흐름으로 돌아갔다.
그가 멀어지자 임설화가 팔을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요. 도현이가 그렇게 겸손하게 나가니까 아예 무시하잖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누르지 못한 분함이 섞여 있었다.
"괜찮습니다."
한도현이 낮게 말했다.
"제게는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임설화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쁘지 않다고요? 저런 취급을 받았는데?"
한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스승의 명령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낙방한 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는 자는 조사되지 않는다.'
조휘랑처럼 그를 별것 아닌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의 안전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었다.
오히려 이런 무시야말로 그가 원하는 가장 완벽한 위장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임설화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저는 그저 조용히 시험을 치르고 싶을 뿐입니다."
그가 대신 그렇게 말했다.
임설화는 그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눈길이 잠시 한도현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그 시선 속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의문이 옅게 어려 있었다.
연회가 한창 이어지는 가운데, 대전 상석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천궁의 장로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의 백발과 긴 수염이 등불 아래 은빛으로 빛났고, 그 존재감만으로도 소란스럽던 방 안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이번 시험은 천명황조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시험이오."
그의 목소리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는 분위기였다.
"황상 폐하께서도 이번 시험의 결과에 큰 관심을 두고 계시니, 다들 부디 소홀함 없이 준비하시길 바라오."
그 말에 조휘랑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황제의 관심이 자신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라 믿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옆에 앉은 이에게 나직이 무언가를 속삭이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한도현은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황상 폐하께서 관심을 두신다면……'
스승이 말한 위험이 더욱 실체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미미하게 떨렸다.
명부에 이름이 오르는 것만으로도 황실의 눈에 들 수 있다면, 그의 뿌리를 캐는 눈초리도 그만큼 예리해질 것이었다.
황실의 관심이란 곧 조사(調査)를 의미했다.
조사란 곧 그의 근본을 파헤치려는 손길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손길이 닿는 곳에는, 그가 결코 드러내서는 안 될 진실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낙방을 향한 결심을 굳혔다.
'시험에서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장로의 말이 끝나자, 다시 연회의 소란스러움이 서서히 방 안을 채워갔다.
누군가는 시험의 방식에 대해 아는 척 떠들었고, 누군가는 지난 시험의 급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사이로 술잔이 오가고,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였다.
임설화는 그런 소란 속에서도 한도현의 표정을 살피며, 그가 유독 말이 없어졌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별다른 말을 걸지는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조휘랑이 다시 한도현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의 곁에 진양성에서 함께 온 시종 하나가 붙어 있었다.
시종은 나이가 지긋해 보였고, 조휘랑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데 익숙한 듯 걸음마저 조심스러웠다.
"한도현."
조휘랑이 낮게 불렀다.
"한 가지만 묻겠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와는 다른, 미묘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출신은 어디인가. 어느 문파, 어느 가문 출신인지 궁금하군."
한도현은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그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조휘랑의 눈빛을 살폈지만, 그 안에서 특별한 악의를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는 어릴 적 사부님께 거두어져 제천궁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조심스레 답했다.
"별다른 가문이나 문파의 출신은 아닙니다."
조휘랑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거두어졌다니?"
"버려진 아기였다고 들었습니다."
조휘랑은 그 대답에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아주 짧게, 뜻을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에 다시 여유로운 웃음이 돌아왔다.
"그렇군. 그런 출신으로 제천궁의 제1대 제자가 되었으니, 백현도 도사님의 은혜가 크다 하겠구먼."
그 말에는 은근한 비하가 섞여 있었다.
버려진 아이가 어찌 감히 명문의 제자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느냐는, 그런 뜻이 그 말투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한도현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어떤 파문도 없이 잔잔했다.
조휘랑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옮겼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종이 그 뒤를 따랐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등불 빛에 길게 늘어졌다가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임설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사람, 진짜 마음에 안 드네요."
한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조휘랑이 아니라, 그를 따르던 시종 쪽으로 향해 있었다.
다만 조휘랑의 시종이 걸음을 옮기며 곁의 다른 시종과 나누는 낮은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한도현의 청각은 그런 작은 소리조차 걸러내지 못할 만큼 무디지 않았다.
"버려진 아기라……"
시종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운무산 근처에서 발견된 아기라던 그 소문 말인가."
"소문이라니?"
다른 시종이 물었다.
"십오 년 전 운무산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진양성에도 그 소문이 흘러들었었지."
그의 목소리에는 지나가는 이야기 이상의 무게가 없었으나, 그 말을 듣는 한도현에게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도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소문이 이미 진양성까지 퍼져 있었단 말인가.'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듯 서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조금의 흔들림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그 대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두 시종은 이미 다른 무리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등불 빛과 사람들의 그림자가 뒤섞여 더는 그들을 구분해낼 수 없었다.
연회는 그렇게 마무리되어 갔지만, 한도현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불안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가 지키려 하는 비밀이, 이미 그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널리 퍼져 있었다는 불안이었다.
운무산이라는 이름 하나가, 진양성이라는 먼 곳까지 흘러 들어가 있었다면.
그것이 과연 어디까지, 어떤 이들의 귀에까지 닿아 있을지 그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등불이 하나둘 꺼져가는 영빈각 안에서, 그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