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자줏빛 낙인의 밤

4화

마당으로 나온 한도현은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저녁 해가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기울며 하늘 전체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붉은빛이 제천궁(帝天宮)의 기와 위로 흘러내려, 마치 세상 전체가 서서히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나뭇잎도, 풍경(風磬)도,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정적 속에서 한도현은 방금 들은 이야기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느꼈다. '네 어머니가 운무산 협곡에서……' 그 뒤에 어떤 말이 이어졌을지, 한도현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스승은 그 말을 꺼낸 뒤 잠시 침묵했고, 결국 뒷말을 삼켰다. 다만 그 짧은 문장 하나가,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한꺼번에 깨워 놓았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가. 왜 지금껏 아무도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하필 오늘, 스승은 그 이름을 꺼내다 멈추었는가. 그 질문들이 마치 서로 얽힌 실타래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풀리지 않은 채 뭉쳐 있었다. "어이, 도현아!" 낭랑한 목소리가 마당 저편에서 날아왔다. 임설화였다. 그녀는 경전 하나를 손에 들고 마당 한쪽 돌계단에 앉아 있다가, 한도현을 발견하자 냉큼 일어나 다가왔다. 밝은 피부에 유난히 큰 눈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또렁또렁하게 빛났다. 치맛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며 뛰어오는 그 모습이, 예법 수업 시간이었다면 분명 사부에게 한소리 들었을 법한 걸음걸이였다. "드디어 나오셨네요, 사부님 방에서 뭘 그리 오래 계셨어요? 저는 여기서 벌써 반 시진(時辰)은 기다린 것 같은데." 한도현은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의 그림자를 지우려 애썼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은 듯했다. "경전을 여쭈러 갔었습니다." "흐응, 시험이 삼 일 남았는데 그럴 여유가 있으셨나 보네요." 임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늘 그렇듯 장난기와 진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저는 아직도 예법(禮法) 조전(朝典) 부분이 헷갈려서 죽겠는데 말이에요. 도현이는 여유롭게 사부님 방에 다녀오시고, 참 팔자 좋으시네요." 한도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가 평소보다 어색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으나 눈은 여전히 무언가에 붙들려 있었다. 임설화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마치 오래 알던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낯선 문장 하나를 발견한 사람처럼. "도현아."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뭔가 이상한데." "이상하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굴이 왜 그래요. 꼭 뭔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녀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 근처를 가리켰다. "여기, 눈썹 사이에 주름이 잡혀 있어요. 도현이는 평소에 이런 표정 안 짓는데." 한도현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늘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었지만, 임설화의 눈은 십오 년 동안 그를 지켜본 만큼 예리했다. 그녀 앞에서는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히 숨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가 겨우 말했다. "거짓말." 임설화가 팔짱을 끼며 눈을 흘겼다. "우리가 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 그 정도는 저도 안다고요. 도현이가 거짓말할 때는 항상 말끝이 조금 빨라져요. 지금도 그랬어요." 한도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임설화는 제천궁의 제1대 제자 열 명 중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같은 해에 입문하여 같은 방에서 경전을 외우고, 같은 마당에서 예법을 익히며 자라온 벗이었다. 어린 시절, 처음 입문했을 때 그녀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아이였다. 지금은 어느새 그와 눈높이가 비슷해졌지만, 그 활발함과 장난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그녀는 늘 그를 놀리는 쪽이었지만, 그 놀림 속에는 언제나 진심 어린 관심이 배어 있었다. 한도현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 관심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아무 일 없었습니다, 설화 아가씨." 한도현이 다시 한번 말했다. 임설화는 그 호칭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또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그냥 설화라고 부르라니까요."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에휴, 진짜." 그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십오 년을 같이 지내도 그 예법을 못 버리네요. 다른 애들은 저를 그냥 설화, 설화 하고 부르는데, 도현이만 꼭 아가씨를 붙이더라니까요." "그것이 예의라 배웠습니다." "예의는 예의고, 저는 좀 서운하다니까요." 그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어릴 적 그녀가 경전 외우기를 힘들어할 때 짓던 표정과 똑같아서, 한도현은 잠시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그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까 사부님 방에 갔다면서요.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한도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네 어머니가 운무산 협곡에서……' 그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 혼자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경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 스승의 노쇠에 대해서도, 자염인에 대해서도, 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 침묵이 그의 목구멍을 답답하게 조여왔다. 임설화는 그 말이 거짓임을 눈치챘는지,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흐응, 그렇단 말이죠." 그녀는 시선을 돌려 마당 저편을 바라보았다. "저는 도현이가 저한테는 뭐든 말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 목소리에 섞인 서운함이 한도현의 가슴을 콱 찔렀다. "설화 아가씨." "됐어요." 임설화가 손을 휙 내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저도 그렇게 캐묻는 성격 아니라고요."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 손끝이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고 있었다. 한도현은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도현은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답답했다. '사부님께서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 말을 떠올리자, 지금 이 순간 그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앎이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앎이 그와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는 듯했다. 그는 그 벽을 허물고 싶었으나, 허무는 순간 그녀마저 위험에 빠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붙잡았다. "시험 이야기나 해요." 임설화가 다시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 전환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한도현은 잠시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를 숙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문리 시험은 「천도경(天道經)」 후반부에서 나온다고 하던데, 도현이는 준비 다 됐죠?" 한도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겠죠. 도현이 문리는 사부님도 인정하시는걸요. 지난달 강론 때도 다른 애들은 다 헤매는데 도현이만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외웠잖아요."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예법도 그럭저럭 되겠고. 술수는……" 그녀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술수는 좀 약하죠, 도현이?" "그렇습니다." 한도현이 순순히 인정했다. 술수란 하늘의 뜻을 점쳐 미래를 짚어내는 학문이었다. 천간지지(天干地支)의 배열을 읽고, 별의 흐름과 절기의 변화를 헤아려 앞날의 길흉을 가늠하는 것이 그 요체였다. 제천궁의 제자라면 응당 익혀야 할 세 가지 학문 중 하나였으나, 한도현은 유난히 그 방면에서 더뎠다. 문리(文理)는 경전의 이치를 깨우쳐 세상의 도리를 논하는 학문이요, 예법(禮法)은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하늘 사이의 마땅한 도리를 익히는 학문이며, 술수(術數)는 그 하늘의 뜻을 미리 짚어내는 학문이었다. 이 셋 중 둘 이상에서 상등(上等)을 받아야 제자로서 승격할 수 있었다. 한도현은 유독 마지막 학문에서 더뎠다. 어쩌면 그것은 그 자신의 미래가, 스승조차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무언가로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별자리를 짚고 괘를 뽑아보아도, 그의 앞날만은 늘 흐릿한 안개에 가려진 듯 잡히지 않았다. "문리와 예법에서 상등을 받으면 어차피 술수는 중등이어도 괜찮잖아요." 임설화가 말했다. "세 과목 중 둘 이상에서 상등이면 되는 거니까. 저는 반대로 술수랑 예법은 자신 있는데 문리가 발목을 잡네요." 그녀가 익살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천도경」 후반부,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도현이가 좀 가르쳐주면 안 돼요?" 한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고갯짓 속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다. '나는 이번 시험에서 반드시 낙방해야 한다.' 그 사실을 그녀에게, 혹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상등을 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를 향해야 하는 처지가 그를 옥죄었다. 겉으로는 여느 제자들처럼 시험을 준비하는 척해야 했으나, 속으로는 그 준비의 방향이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저는 이번에 꼭 상등을 받아서 관직에 나갈 거예요." 임설화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도현이랑 나란히 조정에서 일하는 거죠. 어때요, 좋은 계획이지 않아요? 저는 예부(禮部)에 들어가고, 도현이는 그 문리 실력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면, 우리 둘이 같은 궁궐 안에서 일하는 거예요." 그녀가 마치 이미 이루어진 미래를 보는 것처럼 눈을 빛냈다. 한도현은 그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 이제 그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밝은 눈빛을 마주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좋은 계획입니다." 그가 겨우 답했다. 그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순간, 마당 저편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제천궁의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당 전체를 은은하게 울리며 퍼져나갔고, 붉은 하늘 아래 흩어지던 정적을 다시 하나로 모아들이는 듯했다. 제자들이 하나둘 마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경전을 옆구리에 끼고, 혹은 방금까지 하던 일을 서둘러 정리하며 걸어오는 모습들이었다. 임설화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도현을 바라보았다. "이따가 저녁 먹고 이야기 더 해요. 도현이가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저는 다 알아낼 거니까요." 그녀가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며 종소리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 뒷모습이 붉은 하늘 아래 점점 작아지는 것을, 한도현은 오랫동안 서서 지켜보았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끝내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채, 시간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녁 예불이 끝난 뒤, 한도현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대전으로 이동했다. 제천궁의 제1대 제자 열 명은 모두 이번 문서 승격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각기 다른 지방에서 온 이들이었고, 각기 다른 재능과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는 문리에 능했고, 누군가는 예법에 밝았으며, 누군가는 술수에 통달해 있었다. 그러나 그 열 명 모두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은, 이 시험을 통해 자신의 앞날이 결정된다는 무거운 자각이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회랑을 걸으며, 한도현은 그 열 명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누구는 긴장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고, 누구는 오히려 그 긴장을 즐기는 듯 여유로운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만이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그를 고립시키는 듯했다. 대전 앞에서 만난 나이 든 제자 하나가 한도현에게 다가와 낮게 말했다. 그는 제1대 제자들 중 가장 연장자로, 평소에도 소문에 밝은 자였다. "들었느냐, 이번 시험에 진양성(辰陽城)에서 온 자제도 참가한다는군." "진양성이라 하시면?" 한도현이 물었다. "조휘랑(趙輝郎)이라는 자다. 성주의 아들이라 들었다. 벌써 소문이 자자하더군, 문리와 예법 모두에서 진양성 내 어린 나이 중 최고라 한다." 그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며 덧붙였다. "게다가 그 집안은 조정에 뿌리가 깊다지. 이번 시험에서 상등을 받으면, 곧바로 한림원에 자리를 얻을 것이라는 말도 있어." "그런 자가 어찌 제천궁의 시험에 참가한단 말입니까?" 한도현이 다시 물었다. "제천궁의 승격 시험이 곧 조정 관직으로 이어지는 정식 절차이니 말이다. 아무리 성주의 아들이라 해도, 이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하지." 나이 든 제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허나 그런 배경을 가진 자가 우리와 같은 자리에서 경쟁한다면,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지 않겠느냐." 한도현은 그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조휘랑……' 지금 그에게는 시험의 결과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어쩐지 알 수 없는 예감이 스쳤다. 마치 그 이름이 앞으로 그의 삶에 결코 작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그 예감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이름을 되뇌는 동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대전 안에서는 이미 예비 시험 절차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높은 천장 아래 걸린 등불들이 은은한 빛을 뿌리며, 열 명의 제자들이 앉을 자리마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정면에는 시험을 주관할 장로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가운데 앉은 노장로가 두꺼운 죽간을 펼치며 절차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번 문서 승격 시험은 사흘 뒤, 진시(辰時)부터 시작되며……" 그 목소리가 대전 전체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한도현은 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절차를 듣는 그의 마음은, 다른 제자들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상등을 받기 위해 애쓸 것이었고, 그는 그 반대를 위해 애써야 할 것이었다. 그 기이한 처지가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스승의 마지막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네 어머니가 운무산 협곡에서……'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그는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그 말을 알아내지 않고서는,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이 모든 혼란의 뿌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 밤이 아니었다. 대전의 문이 무겁게 닫히며, 열 명의 제자들의 얼굴 위로 등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들 사이에서, 한도현의 얼굴만이 유난히 어둡게 가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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