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운무산雲霧山은 청람대륙 서쪽 끝에서 만년설과 안개를 함께 두르고 서 있는 산이었다.
산 아래 사람들은 그 산을 두려워했다.
안개가 걷히는 날이 일 년에 채 열흘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자는 다시 나오지 못한다고도 했다.
늙은 나무꾼들은 아이들에게 그 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산신령이 노한 산이다, 하늘이 저주를 내린 산이다, 그런 말들이 세대를 건너 전해졌다.
정작 그 산에 오른 자는 극히 드물었다. 오른 자 중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더욱 드물었다.
산 중턱, 안개가 가장 짙게 고이는 협곡이 있었다.
그곳은 유난히 바람이 불지 않는 자리였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마치 하늘이 손으로 움푹 눌러놓은 것 같은 지형이었고, 그 안에 고인 안개는 몇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다.
그 협곡 안에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붉은 피를 흘리며 눈밭 위에 쓰러져 있었다.
눈은 여인의 몸 주변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흰 천 위에 붉은 물감을 흘려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식儀式을 치른 흔적이었다.
손목에는 칼자국이 선명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정확히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그은 흔적이었다. 마지막 각오를 다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품 안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울음조차 삼킨 채 안겨 있었다.
아이의 몸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인의 마지막 체온이 아이에게로 옮겨간 것이었는지, 아니면 아이 스스로가 그 추위 속에서도 버티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위로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내려섰다.
발밑의 눈이 소리 없이 눌렸다. 마치 그의 몸에 무게가 없는 것처럼.
백현도白玄道였다.
청람대륙에 단 하나뿐인 홍의紅衣 대제사, 하늘의 뜻을 묻고 답을 듣는다는 그 노도사는 협곡 아래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여인의 곁에 앉았다.
여인의 얼굴은 이미 핏기를 잃어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만은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백현도는 여인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이의 가슴팍에 자주색 불꽃 모양의 표식이 타오르듯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화상이나 반점이 아니었다. 표식의 결이 마치 살아 있는 불처럼 미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자염인紫炎印.'
백현도는 속으로 그 이름을 삼켰다.
아주 오래된 문헌, 이제는 아무도 읊지 않는 예언서 속에서만 존재하던 문양이었다. 그가 젊었을 적, 스승의 스승이 남긴 낡은 죽간 더미 속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구절이었다. 그때는 그저 옛사람들의 허황된 상상이라 여기고 넘겼던 문양이었다.
재난의 별災星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날 때 나타난다는 표식.
문헌은 그 표식을 지닌 자가 세상에 두 가지 중 하나를 가져온다고 했다. 하나는 크나큰 재앙, 다른 하나는 그 재앙을 끝내는 자.
어느 쪽인지는 문헌도 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이를 살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이 아이는 태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눈 속에 묻혀야 했다. 그것이 예언서가 말하는 재앙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옛 문헌은 적어두고 있었다.
백현도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노도사의 눈은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울지도 않고, 그저 깜빡이며 자신을 마주 보는 그 눈동자를.
그 작은 얼굴에는 두려움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낯선 세상을 처음 마주하는 순수한 시선뿐이었다.
바람이 잠시 멎었다.
안개가 짙어지며 협곡을 완전히 삼켰다.
마치 하늘조차 이 노도사의 선택을 지켜보려는 것처럼, 협곡 안의 모든 것이 숨을 멈춘 듯했다.
백현도는 오랜 세월 수많은 이의 생사를 하늘의 뜻으로 점쳐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오래 하나의 선택 앞에서 멈춰선 것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운명이란 것도, 결국 사람이 걷는 대로 흐르는 법이지."
백현도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아이를 도포 안에 품었다.
도포 안은 따뜻했다. 아이는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노도사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죽은 여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이름도 모르는 여인이었지만, 그 마지막 선택 앞에서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도현韓道賢.
道를 걷는 자, 賢을 품은 자.
표식이 무엇을 뜻하든, 그 이름이 아이의 앞날을 가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백현도는 아이를 안고 산을 내려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15년 후, 한도성漢都城 제천궁祭天宮.
제천궁의 아침은 늘 종소리로 시작되었다.
청동으로 주조한 거대한 종이 세 번 울리면 제자들은 침소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와 세면을 하고, 다섯 번 울리면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경전을 외웠다.
일곱 번 울리면 조식이었고, 아홉 번 울리면 하루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 규율은 백 년 넘게 이어져 온 것이었고, 제천궁의 제자라면 누구든 눈을 감고도 종소리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한도현은 벌써 세 시간째 마당의 돌바닥 위에 앉아 죽간을 넘기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세 번째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도 침소에 남아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보다 먼저 마당으로 나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각, 마당의 돌바닥은 이슬에 젖어 차가웠다.
검게 그늘진 피부에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열다섯 나이답지 않게 눈빛이 차분했다.
그의 곁에는 죽간 열댓 개가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하나를 다 읽으면 곁에 내려놓고, 다음 것을 집어 드는 손길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흘 뒤면 문서 승격 시험文書陞格試이 있었다.
5년마다 한 번, 천명황조天命皇朝가 직접 주관하여 열리는 이 시험은 각지의 제자들이 관직의 품계를 얻는 관문이었다. 합격하면 제천궁을 벗어나 황도의 관서로 나아갈 수 있었고, 낙방하면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했다.
시험의 형식은 세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는 문리文理, 경전의 뜻을 묻고 그 이치를 논하는 시험이었다.
둘째는 예법禮法, 조정의 격식과 절차를 실제로 시연해 보이는 시험이었다.
셋째는 술수術數, 하늘의 기운을 읽어 점을 치고 그 결과를 풀어내는 시험이었다.
셋 중 두 가지 이상에서 상등을 받아야 비로소 품계를 얻을 수 있었다.
한도현에게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는 죽간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번 눈으로 짚었다.
"천天은 도道로써 만물을 다스리고, 도道는 예禮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손가락이 죽간의 글자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미 수십 번은 읊었을 구절이었지만, 그는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험장에서 시관들이 어떤 질문을 던질지 알 수 없는 이상, 이 구절 하나라도 놓치면 그것이 곧 낙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또 그러고 있네, 도현아!"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임설화林雪花였다.
밝은 피부에 유난히 큰 눈, 언제나 웃음기가 걸려 있는 입매. 제1대 제자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게 명랑한 성정이었다.
그녀는 아직 세면도 마치지 않은 듯, 머리카락 끝이 살짝 젖어 있었고 옷매도 흐트러져 있었다.
"설화, 좀 조용히 해줄래. 마지막 장이야."
"헤헤, 그 마지막 장 벌써 스무 번은 읽었을걸."
임설화가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죽간을 낚아채듯이 들여다보았다.
"이런 거 외운다고 뭐가 달라져? 시험 문제는 어차피 시관들 마음대로일 텐데."
"그래도 외워야지. 떨어지면 5년을 더 기다려야 하니까."
한도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5년이라니,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나는 절대 다시는 죽간 붙잡고 밤새우고 싶지 않아."
임설화가 죽간을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근데 이거 진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천은 도로써 다스리고, 도는 예로써 다스리고…… 그럼 예는 뭘로 다스리는 거야?"
"예는 사람이 스스로 지키는 거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야."
"오, 그럴싸한데?"
임설화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넌 시관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거야?"
"그래야지. 틀린 말은 아니니까."
임설화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웃었다.
"넌 진짜 걱정 안 되나? 나는 벌써부터 손이 떨리는데."
그녀는 자신의 손을 펼쳐 보였다. 정말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떨려도 어쩔 수 없잖아.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지."
"……꼭 그렇게 어른스럽게 말하더라, 너는."
임설화가 입술을 삐죽이며 죽간을 도로 놓아주었다.
"열다섯 살이 무슨 애늙은이처럼."
"넌 나보다 두 달 먼저 태어났잖아."
"두 달이면 누나 아니야?"
"그건 아니지."
한도현이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신기하다는 듯 임설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방금 웃었다. 시험 걱정 때문에 얼굴 굳어 있던 애가."
"안 웃었어."
"웃었잖아, 방금! 아이참, 인정하기 싫으면 말고."
임설화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킥킥 웃었다.
그렇게 웃던 그녀가 문득 표정을 바꾸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데 있잖아, 사부님 오늘 아침에 못 봤어?"
한도현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부님이 왜?"
"몰라, 그냥…… 이상하게 안색이 안 좋으셨던 것 같아서. 나랑 마주쳤는데 나를 한참 쳐다보시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시더라고."
임설화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평소 같으면 '설화야, 오늘도 예법 연습은 했느냐' 하고 물으셨을 텐데, 오늘은 그냥 나를 물끄러미 보시기만 하고…… 뭔가 이상했어. 눈빛이 꼭 뭔가를 재는 것처럼."
한도현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백현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웃는 낯으로 제자들을 대했고, 지나칠 때는 반드시 한 마디라도 건네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그것이 십 년 넘게 이어진 그의 성정이었다.
"……별일 아니겠지."
한도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그는 최근 며칠간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사흘 전, 사부는 저녁 식사에 나오지 않았다.
이틀 전, 사부는 오후 수업을 다른 장로에게 맡기고 홀로 처소에 머물렀다.
어제, 회랑에서 마주쳤을 때 사부는 그를 향해 인사말을 건네다 말고 문득 말을 삼켰다.
그때는 그저 노환이려니 여기고 넘겼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하나로 이어놓고 보니, 그 모든 것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죽간을 접어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사부님 처소에 가보려고."
임설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따라 일어섰다.
"나도 갈래!"
"넌 시관 앞에서 예법 다시 외워야 하잖아. 어제 또 틀렸다고 하지 않았어?"
"아이참, 그거 지금 말하기냐!"
임설화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한도현은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야, 도현아! 나 진짜 서운하다!"
그녀가 뒤에서 외쳤지만, 한도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손을 살짝 들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임설화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죽간을 챙겨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 나름의 걱정이었다. 예법을 다시 외워두는 것도, 사부의 안부를 살피러 가는 그를 방해하지 않는 것도.
제천궁의 회랑을 따라 걷는 동안, 안개가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짙은 안개였다.
회랑의 기둥들이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윤곽만 드러냈고, 저 멀리 대전의 지붕은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하늘이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처럼.
지나치는 다른 제자들도 그 안개를 이상히 여기는 눈치였다. 한 무리의 제자들이 마당 한켠에 모여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오늘 안개가 유난하네."
"그러게, 이런 날은 재수가 없다던데."
"쉿,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한도현은 그 곁을 지나며 그들의 말을 흘려들었다. 미신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한도현은 그 안개 속을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를 만졌다.
옷깃 아래, 오래된 자주색 흉터 같은 표식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있었던 것이었고, 스승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그 표식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여섯 살이었나, 일곱 살이었나. 목욕을 하다가 우연히 다른 아이가 그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른 뒤였다.
그때 백현도는 그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었다.
"그것은 네가 짊어진 짐이 아니다. 다만 네가 걸어야 할 길의 표식일 뿐이야."
그 이후로 한도현은 다시 묻지 않았다. 스승이 그 이상 말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안개 속을 걸으며, 그 오래된 기억이 문득 다시 떠오른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은 왠지,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네.'
그 생각을 하며 사부의 처소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한도현의 걸음이 멈췄다.
그 기침 소리가, 평소의 사부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평소 백현도의 기침은 짧고 가벼웠다. 목이 조금 건조할 때 나오는, 그런 정도의 기침이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깊고 무거웠다. 마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듯한, 그런 기침이었다.
기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이어졌다가 잠시 멈추고, 다시 이어졌다.
문 너머에서는 낮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한도현의 손끝이 문고리 앞에서 떨렸다.
안개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짙었다. 마치 이 처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상으로부터 감추려는 것처럼, 회랑 전체를 무겁게 둘러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