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위장 초능력 택시기사

2화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뛰었다. ..봤어. 저 사람, 방금 나를 봤어. 편의점 앞, 형광등 불빛 아래 서 있던 남자였다. 정장 차림에 담배도 안 피우면서 그냥 서 있었다. 처음엔 그냥 누굴 기다리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저 남자의 시선이 딱 나한테, 정확히는 내가 몰고 있는 택시 안, 운전석에 앉은 예순세 살 박씨한테 꽂혔을 때 그 눈빛이 뭔가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본 게 아니다. 저 남자가 본 건 예순세 살 박씨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걸 봤다. 그렇게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게 스쳤다. 목덜미 실리콘 밑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진정해. 진정해라, 박도윤.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미련 없이 밟았다. 늙은이답지 않은 속도였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저 남자가 뭘 봤는지, 뭘 확신했는지 몰라도 여기서 얼쩡거리다간 죄다 들킬 판이었다. 골목 세 개를 돌아서 큰길로 나왔다가 다시 좁은 길로 꺾었다. 백미러를 세 번, 네 번 계속 확인했다. 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걸어서 따라올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손이 자꾸 핸들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가, 그 짓을 반복했다. ..괜한 걱정인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반년 동안 잘 버텨왔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반년이다. 그 반년 동안 나는 예순세 살 늙은 기사로, 허리 아픈 흉내를 내며, 손목에 파스를 붙이는 시늉까지 하며 살았다. 그 노력이 저 남자 한 명의 눈빛에 무너지는 건 말이 안 됐다. 말이 안 되는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다음 손님을 태우려고 잠깐 정차했을 때,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조수석 문을 열고 아무렇지 않게 탄 것이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잘도 나타났다, 이 자식. 도망친 게 아니라 오히려 정면으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청계 쪽으로." 낮고 담백한 목소리였다. 방금 전 그 편의점 앞 남자가 확실했다. 정장, 무표정, 그리고 그 눈빛. 가까이서 보니 나이는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였고, 몸에서 나는 분위기가 보통 사람하고는 확실히 달랐다. 앉는 자세부터 그랬다. 등을 곧게 세우고, 시선은 정면을 보되 실은 사이드미러로 내 손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네, 손님." 최대한 늙은이 목소리로 답했다. 손이 핸들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목소리 톤을 낮추는 건 반년 동안 해온 습관이라 어렵지 않았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성대가 말을 안 들었다. 차는 조용히 움직였다. 남자는 뒤가 아니라 조수석에 앉았다. 보통 손님은 그렇게 안 앉는다. 조수석은 왠지 어색해서 다들 뒷자리를 선호한다. 이 남자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거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아저씨, 이 일 오래 하셨나?" "삼십 년쯤 됩니다." 숫자를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산이 딴 걸 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원하는 답이 뭘까. 삼십 년이라고 하면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너무 딱 떨어져서 오히려 의심을 사나. "그래요? 손이 참 곱네." ..뭐?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남자는 웃지도 않고 그냥 앞을 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 뜻 없는 말이라는 듯. 근데 그럴 리가. 삼십 년 운전한 손에 이렇게 굳은살도 없고 흉터도 없다는 걸, 저 남자는 벌써 눈치챈 거다. 핸들을 쥔 실리콘 손끝, 그 밑에 진짜 내 손이 있다는 걸 저 남자가 안다면. 안다면 이 차는 지금 이 순간 목적지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될 수도 있었다. "세월이 좋아서 그런지, 손 관리들 다 잘하시더라고요." 남자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조금 웃는 듯했다. 그 웃음이 더 무서웠다. 진짜 웃는 게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고 즐기는 웃음. ..이 자식, 알아챈 거다. 확신은 아니고 의심이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위험하다.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이 지나갔다. 여기서 급정거를 해서 도망갈까. 아니, 그러면 바로 정체가 드러난다. 침착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조용히 사라지는 게 최선이었다. 스승님이 항상 하던 말이 떠올랐다. 침착한 놈이 이긴다. 흔들리는 놈이 먼저 죽는다. "손님, 어디 청계 몇 가로 가시면 되나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목소리에 티가 안 나도록, 딱 늙은이가 손님한테 확인하는 정도의 톤으로.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지시했다. "저기 앞에서 세워줘요."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남자는 지폐를 던지듯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지폐가 조수석 시트 위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손을 뻗지 못했다. 손을 뻗다가 흔들리면 안 되니까. 내리기 직전, 그가 몸을 살짝 돌려서 나를 봤다. "조심히 다니세요, 어르신.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그 말투가 이상했다. 걱정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비꼬는 듯한, 아니면 경고하는 듯한. 세상이 흉흉하다는 그 말이 마치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너 조심해라'가 아니라 '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로 들렸다. 문이 닫혔다. 텅- 남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지폐를 주울 생각도 못하고, 그냥 핸들에 두 손을 얹은 채로 숨만 몰아쉬었다. ..저게 흑성회 놈이구나. 확신이 들었다. 스승님을 죽인 조직, 이제 나를 냄새 맡은 조직. 그놈이 뭘 확신했는지는 몰라도 다시 만나면 안 되는 건 확실했다. 흑성회.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기만 해도 손끝이 다시 떨렸다. 반년 전, 스승님이 그놈들 손에 돌아가시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도망쳤다. 도망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숨었다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결국 도망친 거였다. 그리고 그 도망이 이제야 끝날 때가 왔다는 걸, 그 남자의 눈빛 하나로 알아버렸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 병가를 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안 나갔다. 콜센터에 전화해서 목이 아프다고 늙은이 목소리로 둘러댔는데, 담당자가 별 의심 없이 알겠다고 했다. 그 순간에도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로 완벽했으면서 왜 하필 그 남자 눈은 못 속였을까. 작은 방 안, 침대 밑을 뜯어 숨겨둔 상자를 꺼냈다. 나무 바닥 판을 손톱으로 들어 올리는 그 감촉, 반년 동안 딱 세 번 만져본 감촉이었다. 스승님이 살아 계실 때 만들어준 물건들이었다. 위조라고 부르기 미안할 만큼 완벽한 신분증, 학생증, 통장, 휴대폰까지. 각각 이름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얼굴도 조금씩 다르게 세팅된 신분들이 서너 개나 됐다. 스승님은 항상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이 널 못 알아보게 만드는 게 실력이야. 강한 척하는 놈들은 다 먼저 죽어." 그 말이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그때는 그냥 스승님이 하는 잔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 이 순간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목숨줄이 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 앉았다. 은발 가발을 벗었다. 두피에 붙어 있던 접착 부분이 떨어지면서 따끔한 느낌이 스쳤다. 실리콘을 하나씩 떼어냈다. 눈가, 볼, 턱선 순서로. 손끝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반년 동안 매일 밤 붙이고 뗐던 순서라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늙은 얼굴 밑에서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스물네 살, 눈매가 좀 날카롭고 광대가 도드라진,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얼굴. ..박도윤. 오랜만이다, 이 얼굴. 거울 속 얼굴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상하게 낯설었다. 반년 동안 매일 봐온 게 늙은 박씨 얼굴이었으니까, 진짜 내 얼굴이 오히려 남처럼 느껴졌다. 이게 웃긴 건지 슬픈 건지 판단이 안 됐다. 박씨 아저씨의 신분증과 가발과 서류는 봉투에 담아 강 하류 쪽에 버렸다. 새벽 세 시, 인적 없는 다리 위에서 봉투를 강물에 던지는 그 순간까지도 손이 떨렸다. 태워버리는 게 확실했지만 냄새가 나면 오히려 의심을 산다. 그냥 조용히 버리는 게 나았다. 스승님이 그렇게 가르쳤다. 확실하게 없애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없애는 게 낫다고. 새 신분증을 꺼냈다. 사진 속 얼굴은 지금 거울 속 얼굴과 똑같았다. 이름은 '이도윤'. 대한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나이는 스물넷. 실제 나이랑 딱 맞아서 웃음이 나왔다. 스승님이 이 신분을 만들 때 나이까지 맞춰준 건, 나이를 속이는 것보다 진짜에 가까울수록 완벽해진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학생증 사진 밑에 적힌 학번을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문질렀다. 진짜 대학생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 신분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대학가로 이사한 날 밤, 원룸 창문 너머로 대학교 캠퍼스의 불빛들이 보였다. 축제 준비인지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 웃음소리, 학생들 몇몇이 삼삼오오 모여 걷는 소리까지 여기서 다 들렸다. ..진짜 대학생 흉내를 내야 하는 건가. 짐을 대충 풀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봤다. 캠퍼스 정문 근처, 가로등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이쪽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거리감. 가로등 불빛에 반쯤 가려진 얼굴, 정장은 아니었지만 서 있는 자세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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