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김치로 마법사 되기로 했다

4화

다음 날 아침, 오전 7시. 서태림이 방문을 두드렸다. "일어나. 학원장 만나야 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됐다. 어젯밤 반지에 끌려 이 세계로 넘어온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밤새 한숨도 못 잔 기분이었다. 그런데 몸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근육 하나하나가 다르게 반응했다. 평소라면 아침마다 삐걱거리던 무릎도 멀쩡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 세계가 내 몸에 뭔가를 한 걸까. 아니면 원래 이랬던 걸까. 옷을 갈아입으면서 창밖을 봤다. 낯선 하늘색이었다. 지구의 하늘보다 조금 더 진한 파랑. 구름도 뭔가 이상하게 뭉쳐 있었다. 오전 7시 30분. 학원장실 앞에 섰다. 거대한 문 두 개가 자동으로 열렸다. 안에는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인상이 차가웠다. 책상 위에는 낡은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위로 마법진 하나가 허공에 떠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노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마력인 것 같았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다. "파괴법사라고." 노인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것 같았다. "이름은." "강민준입니다." "마법은 배운 적 없고." "없습니다." "그런데 몸으로 마법을 부순다." "그런 것 같습니다." 노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게 다였다. 표정에 변화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노인이 서태림을 쳐다봤다. "자네처럼 쓸모없는 종류인가." 서태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봤다. 그 안에 삼십 년의 무언가가 쌓여 있는 게 느껴졌다. 서태림이 이 세계에 얼마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저 눈빛은 오래된 상처가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무시당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나는 괜히 서태림의 손을 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입학은 허가하지. 단, 정규 마법 수업은 못 따라갈 테니 보조반으로 배치한다."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감사였다. 감사한 마음은 없었다. 방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봤다. 노인은 이미 다른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처리해야 할 안건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오전 8시. 보조반 교실로 이동했다. 복도를 걸으며 서태림에게 물었다. "보조반은 뭐 하는 곳이에요?" "마법 재능이 부족한 애들 모아놓은 곳." "저처럼요?" "자네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교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 다들 나를 힐끔 보고 다시 자기들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중 몇몇은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봤다. 옷차림 때문인지 표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앉아." 서태림이 맨 뒷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조용히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놓은 글자들. 읽을 수 없는 이 세계의 문자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좋은 뜻은 아닐 것 같았다. 수업이 시작됐다. 담당 교사는 젊은 여자였다. 손끝에서 불꽃을 만들어내는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원소를 응축시키면 됩니다." 불꽃이 손바닥 위에서 작은 구 모양으로 뭉쳤다. 색깔이 오묘했다.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이면서도 어딘가 투명했다. 저런 걸 만들어내려면 얼마나 오래 훈련해야 하는 걸까. 학생들이 하나씩 시도했다. 작은 불꽃들이 하나둘 피어났다. 크기는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뭔가는 만들어냈다. 내 차례가 왔다. 손을 내밀었다. 집중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다시 시도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로 시도했다. 손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가 곧 사라졌다. 그게 다였다. 불꽃 비슷한 것조차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래서 뭘 배우겠다는 거야." "파괴법사면 그냥 마법을 못 쓰는 거잖아."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야." 귀가 뜨거워졌다. 부끄러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무덤덤했다. 대신 배가 고팠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수업 시간 내내 다른 학생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불꽃을 봤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교사가 나를 몇 번 힐끔거렸다. 동정하는 눈빛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인지 구분이 안 됐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시선을 몇 번이나 느꼈다. 오후 12시 10분. 식당에 갔다. 큰 접시에 낯선 요리가 담겨 나왔다. 색이 이상했다. 보라색 국물에 초록색 잎이 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었다. 심지어 맛있다는 표정을 짓는 애들도 있었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건가. 한 입 먹었다. 맛이 없었다. 너무 쓰고 비렸다. 두 번째 숟가락을 뜨려다 그냥 내려놨다. 배는 고픈데 이걸 먹느니 그냥 굶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구에서는 이런 걸 먹은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때 가방 속에서 뭔가가 떠올랐다. 어제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챙긴 도시락. 집을 나선 뒤 반지에 끌려오는 바람에 그대로 가방에 들어 있었다. 가방을 열었다. 엄마가 싸준 반찬통이 있었다. 마늘장아찌, 고추장 볶음, 김치. 오래되지 않아 냄새는 괜찮았다. 반찬통 뚜껑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퍼졌다. 집 냄새였다.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가 아침에 반찬통을 싸주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밥은 챙겨 먹어." 그 평범한 말이 지금은 다른 세계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끈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고 조용히 반찬통을 열었다. 마늘장아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반지가 뜨거워졌다. 손끝이 저릿했다. 입 안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졌다. 눈앞이 잠깐 흔들렸다. 세상이 잠깐 이중으로 겹쳐 보이는 느낌이었다. 색깔들이 번져 보이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어지러움과 비슷했지만 뭔가 다른 감각이었다. "뭐야." 주변 학생 하나가 나를 쳐다봤다. "너 방금 뭐 먹었어?" "그냥 반찬." "방금 마법 기운이 확 퍼졌는데." 주변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나를 쳐다봤다. 호기심 반, 의심 반의 시선이었다. 나는 반찬통을 얼른 닫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식당 안이 갑자기 좁아진 느낌이었다.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반찬통을 가방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1시 5분. 수업이 끝나고 서태림을 찾아갔다. 복도를 뛰다시피 걸으면서 방금 있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계속 생각했다.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교수님, 마늘장아찌 먹었는데 마법 기운이 났대요." "뭐?" "제가 가져온 지구 반찬이요." 서태림의 눈이 커졌다. "보여줘." 책상 위 서류들을 밀어내고 자리를 만들었다. 서태림의 손짓이 평소보다 빨랐다. 반찬통을 꺼냈다. 서태림이 조심스레 마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대자, 옅은 초록빛이 마늘 표면에서 흘렀다. 빛은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했다. 서태림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이거…….." 서태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성마늘이야." "성마늘이요?" "희귀한 정화 약초. 이 세계에서는 백 년에 한 번 자란다는 전설의 재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그냥, 마트에서 산 마늘이에요." "마트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진짜야." 서태림이 마늘을 조심스레 향로 위에 올렸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작은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마늘이 빛을 내며 타올랐다. 연기가 방 전체를 채웠다. 연기 색깔이 계속 바뀌었다. 초록에서 파랑, 파랑에서 다시 흰색으로. 그 연기가 닿는 순간, 낡은 화분에서 시들어가던 꽃이 갑자기 활짝 피어났다. "이건…….." 서태림이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 눈빛에서 뭔가 계산이 시작되는 게 보였다. 숫자를 세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자네, 반찬통 안에 뭐가 더 있나." "고추장이랑 김치요." "그거, 다시는 함부로 먹지 마."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뭔가 통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 실감이 기쁘기보다는, 이상하게 서늘했다. 서태림이 반찬통을 조심스레 다시 닫으며 말했다. "이거 함부로 다루면 안 돼. 알겠지?" "네." "진짜야. 이건 이 세계에서 재산이야." 재산이라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엄마가 싸준 밑반찬이 재산이라니.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오후 1시 40분. 서태림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거 증명되면, 자네 위치가 완전히 바뀔 수 있어." "어떻게요." "파괴법사가 아니라, 희귀 약초를 다루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거지." 서태림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세계에서 성마늘 한 조각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모르죠." "작은 왕국 하나 살 수 있을 정도야." 그 말에 처음으로 뭔가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왕국을 살 수 있는 가치라니. 엄마가 마트에서 산 마늘이. 하지만 곧바로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지구 시간. 1대6. "교수님, 저 지금 몇 시간째 여기 있는 거예요." "어제부터 계산하면… 열여덟 시간쯤." 열여덟 시간. 곱하기 여섯. 108시간. 나흘 반. 손끝이 차가워졌다. 엄마가 지금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상상이 됐다. 학교에서는 무단결석으로 처리됐을 것이다. 아니, 벌써 실종 신고가 됐을지도 모른다. "저 지금 가야 해요." "아직 반지가 안정되지 않았다니까." "언제 되는데요." 서태림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마늘 조각을 다시 봤다. 왕국 하나의 가치라는 말이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졌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엄마가 있는 집. 그 평범한 아침.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서태림의 얼굴을 봤다.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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