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김치로 마법사 되기로 했다

2화

차가운 바닥이 등에 닿았다. 돌인지 흙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축축했다. 등허리로 냉기가 스며들어왔다. 눈을 떴다. 하늘이 이상했다. 별이 두 개의 달 주위를 돌고 있었다. 달은 하나가 붉고 하나가 푸른색이었다. 별들은 마치 그 두 달을 중심으로 궤도를 그리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하늘은 본 적이 없었다. 사진에서도, 영화에서도. "뭐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목이 말랐다. 침을 삼켰다. 일어나 앉았다. 주변은 숲이었다. 나무는 붉은 잎을 달고 있었다. 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만져보니 종이처럼 얇고 서늘했다. 나무껍질은 검은색이었고, 표면에 실핏줄 같은 무늬가 있었다. 공기는 습하고 차가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이 서늘해졌다. 내 방이 아니었다. 한국이 아니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제까지 나는 분명 내 방 침대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낯선 숲의 흙바닥 위에 있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뭉텅 잘려나가 있었다. 반지를 봤다. 여전히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뜨거움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은은한 빛이 문양 위에서 흘렀다. 빛은 숨을 쉬듯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심장 박동과 비슷한 리듬이었다. 오후 8시 41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 시각이 아니었다. 숫자가 이상하게 빠르게 흘렀다. 초침이 두 배쯤 빠르게 도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 감각이 느려진 건가. 그것도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대답은 없었다. 내 목소리만 숲 사이로 퍼졌다가 흡수되듯 사라졌다. 새소리도 없었다. 벌레 소리도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숲이었다. 대신 멀리서 뭔가가 움직였다. 숲 속에서 그림자가 다가왔다. 처음엔 나무 사이의 어둠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어둠이 걸어오고 있었다. 형체는 사람 같았지만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관절이 반대로 꺾여 있었다. 무릎이 뒤로 굽어 있었다. 팔꿈치도 마찬가지였다. 걸을 때마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딱, 딱, 딱. 세 걸음마다 그 소리가 반복됐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뒤로 물러섰다. 나무에 등이 닿았다. 등 뒤로 딱딱한 껍질이 느껴졌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림자가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파란 불꽃이 피어났다. 불꽃은 손가락 끝에서 작게 일렁이다가 점점 커졌다. 탁, 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으악." 불꽃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피할 틈이 없었다. 숨을 삼켰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도망쳐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몸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불꽃이 몸에 닿았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뜨거워야 하는데 뜨겁지 않았다. 타야 하는데 타지 않았다. 대신 불꽃이 내 몸에 닿는 순간, 유리처럼 부서졌다. 쨍, 하는 소리가 났다. 파편이 흩어졌다. 파편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졌다. 그림자가 멈춰 섰다. "이게 뭐야." 나도 몰랐다.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옅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안개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다가, 공기와 닿는 순간 흩어졌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림자가 다시 손을 들었다. 이번엔 두 개의 불꽃이었다. 좀 전보다 크기가 두 배는 컸다. "멈춰." 소리를 질렀지만 통할 리 없었다. 불꽃이 날아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또 부서졌다. 이번에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처럼 흩어졌다. 얼굴 옆으로 파편이 스치듯 지나갔는데, 아무 감촉도 없었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두 번째도 그랬다. 그림자가 뒷걸음질쳤다.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가 이번엔 더 다급하게 들렸다. 딱딱딱딱. 뭔가를 두려워하는 몸짓이었다. 괴물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느껴야 하는 안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손끝이 계속 차가웠다. 숨은 여전히 얕고 빨랐다. 안도해야 하는 순간에 안도가 오지 않는다는 것. 그 공백이 더 무서웠다. 오후 8시 53분. 그림자가 몸을 돌려 도망쳤다.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숨이 가빴다. 손이 떨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법 같은 것이 나를 공격했다. 그런데 나에게 닿는 순간 부서졌다.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반지를 다시 봤다. 문양 위의 빛은 여전히 숨 쉬듯 깜빡이고 있었다. 이 반지 때문일까. 아니면 나 자체가 원인일까. 질문만 쌓이고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두 발로, 정상적인 걸음이었다. 관절이 꺾이는 소리 없이, 그냥 사람의 걸음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됐다. "거기 누구요."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걸걸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아직 후들거렸지만 억지로 힘을 줬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다. 얼굴은 험하게 생겼다. 코가 비뚤어져 있었고 뺨에는 오래된 화상 흉터가 있었다. 흉터는 눈가에서 턱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는 습관이 있는 눈이었다. "자네, 방금 그거……."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얼굴에서 손으로, 그리고 반지로 옮겨갔다. 그리고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봤다. 눈이 커졌다. "소환된 건가." "소환이요?" "반지를 통해 이곳으로 넘어온 거지." "당신, 뭔데요." 경계심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방금 마법 공격을 받은 직후였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서태림. 이곳 마법학원 교사다." 마법학원. 교사. 두 단어가 머릿속에서 겉돌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알던 세계에는 마법학원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교사라는 단어는 익숙했지만, 그 뒤에 붙은 '마법학원'이라는 말과 조합되니 전혀 다른 의미가 됐다. "방금 마법을 부순 건가." 서태림이 물었다. 목소리에 호기심과 경계가 반쯤 섞여 있었다. "부순 게 아니라, 그냥 닿았는데 없어졌어요." "닿기만 했는데." "네." 서태림의 표정이 굳었다.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파괴법사." "뭐라고요." "자네, 마법이 통하지 않는 몸이야. 아니, 통하는 게 아니라 마법 자체를 파괴하는 몸이지."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괴법사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직접 겪었잖나." 맞는 말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손끝을 다시 봤다. 검은 안개는 이미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내 손이었다. 그런데 그 평범한 손이 방금 두 번의 공격을 무효로 만들었다. "여긴 위험해." 서태림이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 오래된 흉터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일단 나를 따라와."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방금 만난 사람을, 이런 낯선 곳에서 무조건 믿어야 하나. 그런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혼자 이 숲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차갑고 거친 손이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여러 겹으로 박혀 있었다. "왜 도와주는 거예요." "이유는 나중에 말해주지." 대답이 짧았다. 더 캐물을 틈도 주지 않고 서태림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오후 9시 8분. 숲을 벗어나자 멀리 성벽이 보였다. 거대한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첨탑 끝마다 희미한 빛이 감겨 있었다. 창문마다 빛이 흘러나왔다. 불빛의 색이 제각각 달랐다. 푸른빛, 붉은빛, 노란빛이 뒤섞여 마치 거대한 등불 같았다. "저게 뭐예요." "천계 마법학원." 서태림이 짧게 답했다. 그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심장도 같이 빨리 뛰었다. 성벽이 가까워질수록 그 규모가 더 실감났다. 높이가 대략 오십 미터는 될 것 같았다. 성벽 위로 누군가가 순찰을 도는지, 작은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서, 나 뭘 해야 하는데요." 서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소리만 계속됐다. 자갈이 밟히는 소리, 마른 잎이 부서지는 소리.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계속 질문을 삼켰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정리가 되지 않아서 뭘 먼저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대신 뒤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살아남는 것부터."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살아남는다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들린 적이 없었다. 방금 두 번의 마법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게 시작일 뿐이라는 뉘앙스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성벽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반지의 빛은 여전히 손가락 위에서 숨 쉬듯 깜빡였다. 그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첨탑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누군가가 성벽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할 틈도 없이, 서태림이 성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말해두지." 그가 처음으로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흉터 있는 얼굴 위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안에서, 자네가 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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