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산바람이 마당을 훑고 지나갔다.
흙 마당 위로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그 어스름을 가르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여기서 뭘 하는 게냐!"
박순영이 다가서며 임서연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실렸는지, 임서연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어머니, 그게……"
임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소반을 들고 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 잡종에게 밥을 가져다준 게냐?"
박순영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시선이었다.
그 눈빛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래도록 다져진 확신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내 딸이 폐물 따위에게 정을 줄 필요는 없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 여자와 말을 섞는 순간, 나 자신이 더 초라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그녀를 더 자극한 듯했다.
박순영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뭐냐, 그 표정은. 억울하다는 거냐?"
박순영이 코웃음을 쳤다.
"임가의 성을 쓰면서 임가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놈이. 뒷산 늙은이가 죽었으니 이제 정말 갈 곳도 없겠구나."
그 말이 귀에 박혔다.
갈 곳이 없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박덕수 노인이 살아 있을 때는, 적어도 이 오두막이 내 것이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온전히 내 것이라 부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임서연이 어머니의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넌 조용히 해라."
박순영이 딸을 밀치듯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임서연의 발이 흙바닥을 짧게 끌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리고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오늘 시험도 봤겠지. 결과가 어땠는지 이미 온 마을에 다 퍼졌다.
혼력 자질 0.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야."
그녀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벌써 그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 말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수군거리는 시선, 등 뒤에서 들려올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만큼은.
"할 말이 없느냐?"
박순영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 눈빛 속에 이미 답을 정해둔 듯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없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그녀의 안색을 살짝 굳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마 내가 발끈하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며 매달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박순영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입가를 씰룩였다.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내 그녀는 다시 딸을 향해 매섭게 말했다.
"가자.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어머니……"
"당장!"
박순영의 목소리가 산자락을 울렸다.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몇 마리가 놀라 날아올랐다.
임서연은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머니에게 끌려 산길을 내려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둑해지는 산길 사이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소반은 마당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밥그릇 위로 하얀 김이 아직도 옅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온기가 무색하게, 마당은 순식간에 다시 텅 비어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임서연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씁쓸했다.
그녀는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 때문에.
그저 밥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그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는 몸을 굽혀 소반을 집어 들었다.
그릇이 서로 부딪히며 작게 딸그락거렸다.
그 소리마저 오늘따라 유독 크게 들렸다.
나는 소반을 들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바깥의 냉기가 조금은 가려졌다.
낡은 호롱불 아래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알을 씹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밥을 먹는 동안 머릿속으로 비급의 구결을 다시 떠올렸다.
한 글자, 한 구절씩 되짚어보았다.
아직 몸에 완전히 익지 않은 동작들이 머릿속에서 어긋난 채 흩어졌다.
힘이 필요했다.
임가의 억압을 무너뜨릴 힘.
임서연을 지킬 수 있는 힘.
박덕수 노인의 이름을 더 이상 욕되지 않게 할 힘.
그 세 가지가, 지금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의 전부였다.
그날 밤, 나는 다시 뒷산으로 올라갔다.
발밑에서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소나무 세 그루 아래, 노인의 무덤 앞에 섰다.
흙은 아직 완전히 다져지지 않아 있었다.
그 위로 밤이슬이 옅게 내려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저는 폐물이 아니라고 하셨죠."
나는 무덤 앞에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그 정적 속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검을 뽑았다.
검신이 달빛을 받아 짙은 흑청색으로 빛났다.
차가운 쇠의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비급의 첫 구결을 다시 되새기며, 몸을 움직였다.
발을 내딛는 각도, 손목을 꺾는 순간의 힘, 호흡을 고르는 속도.
하나하나 되짚으며 동작을 이어갔다.
동작은 여전히 어설펐다.
검끝이 흔들리고, 균형이 무너질 때마다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며칠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몸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온기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그 온기는 분명한 실체로 느껴졌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밤공기가 날카롭게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팔이 무거워지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갑자기, 품속에 넣어두었던 흑색 옥환이 다시 옅은 빛을 발했다.
나는 동작을 멈췄다.
숨이 턱 막혔다.
지난번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빛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가슴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얇은 옷감을 뚫고 새어 나올 정도였다.
나는 옥환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 안에서 옥환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진동이 손목을 타고 팔뚝까지 번져왔다.
동시에 몸속 깊은 곳에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기운이 서서히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온기와는 달랐다.
차갑고, 낯설고, 어딘가 위태로운 감각이었다.
등골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번졌다.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노인의 무덤 앞에 선 채로, 나는 손바닥 위의 옥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빛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 안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까지의 나와, 지금부터의 나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