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나는 재빨리 목함을 닫고 책자와 검, 옥환을 옷자락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숨을 죽인 채 통로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다가, 무덤가 근처에서 멈췄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석실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그 어둠이 오히려 나를 숨겨주고 있었다.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손끝으로 옷자락 속 옥환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더 이상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나가던 산짐승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숨소리조차 죽인 채 백을 셌다.
그래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조심스레 어깨를 벽에서 떼어냈다.
나는 조심스레 석실을 빠져나왔다.
다시 흙으로 입구를 덮었다.
누구의 눈에도 발견되지 않도록.
손바닥에 묻은 흙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풀잎 소리뿐이었다.
오두막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 밤, 등불 아래에서 책자를 다시 펼쳤다.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첫 장의 짧은 글을 다시 읽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진짜 주인이 될 것이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선한 마음을 가진 자인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끝이 문득 멈췄다.
뒷장에 접혀 있던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손끝으로 그 접힌 자국을 매만졌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마른 냄새가 났다.
펼쳐보니, 훨씬 촘촘한 필체로 쓰인 긴 글이었다.
글씨는 앞장보다 훨씬 급하고 거칠었다.
이것은 일기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남긴 고백 같았다.
『나는 태어날 때 혼력 자질이 0이었다.
임가는 나를 폐물이라 불렀다.
그러나 박덕수 어르신은 나를 거두어 주셨다.
어르신은 내게 처음으로 사람됨을 가르쳐주신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각성했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다만 어느 날, 잠들어 있던 혼력이 깨어났다.
그날 이후 나는 임가 제일의 강자가 되었다.
가주는 나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이용하고자 했다.
그는 내게 무고한 자를 해치라 명령했다.
그 무고한 자는, 다름 아닌 나를 거두어주신 은인, 박덕수 어르신이었다.
나는 거부했다.
가주는 병력을 동원해 어르신을 해치려 했다.
나는 검을 들었다.
결국 가주와 그를 따르던 세력을 내 손으로 처단했다.
임가는 그날 이후 크게 흔들렸고, 나는 가문을 떠났다.
흑색 옥환은 내가 각성한 순간 응축된 혼력의 결정이다.
임가의 시조가 남긴 신물이라고도 전해지나, 정확한 유래는 나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옥환은 내 혼력의 근원이자 증거였다.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언젠가, 나처럼 폐물로 불리는 자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에게 이 검과 옥환, 그리고 이 비급을 전한다.
부디 나보다 나은 길을 걸어라.』
나는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올랐다.
폐물이었던 자가, 훗날 임가 제일의 강자가 되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 또한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종이를 다시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목함 속 검을 꺼내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나는 검을 뽑아보았다.
검신이 등불 아래에서 짙은 흑청색으로 빛났다.
손에 쥐는 순간, 이상하게도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딱 맞는 느낌이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흑청색 빛이, 마치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허공에 가만히 검을 들어보았다.
팔이 떨리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검끝이 허공의 한 점을 겨누고 있었다.
결심이 섰다.
노인의 무덤 앞에서, 그리고 임휘검의 유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주어진 폐물의 삶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비급의 첫 구결을 눈으로 훑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기호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하는 듯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손끝이 저절로 움직이려 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새벽, 아무도 모르게 뒷산 깊은 곳으로 올라갔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각이었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발밑의 이슬은 짚신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급의 구결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저 흉내에 불과했다.
팔을 뻗는 각도도, 다리를 딛는 순서도 모두 서툴렀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 넘어졌다.
흙바닥에 무릎을 찧을 때마다 낮게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나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몸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 온기는 처음엔 아주 미약해서,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매일 아침, 그 온기는 조금씩 선명해졌다.
마치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오두막 마당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작은 소반을 들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아침 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로 옅게 내려앉아 있었다.
임서연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당황한 듯 걸음을 멈췄다.
소반을 든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조심스레 다가와 소반을 내려놓았다.
소반 위에는 밥 한 그릇과 나물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이거…… 아침에 남은 밥이야. 버리기 아까워서."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다정했다.
시선은 자꾸만 내 얼굴이 아니라 소반 위를 향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낮게 말했다.
"필요 없다."
"그래도……"
그녀가 더 말을 잇기 전에, 산길 아래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서연아!"
박순영이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산길을 올라오며 딸을 향해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분노가 함께 배어 있었다.
임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소반을 놓은 채 뒷걸음질쳤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다가오는 박순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이는 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분명한 적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