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흑옥환의 후계자

1화

임가 본채 앞마당. 이른 봄이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스며들었다.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흙바닥은 발을 디딜 때마다 축축한 소리를 냈다. 마당을 둘러싼 담장 너머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렸다. 겨울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그 나뭇가지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울며 지나갔다. 마당 한가운데 놓인 검은 감응석 앞으로 아이들이 한 명씩 불려 나갔다. 혼력 자질 시험. 삼 년에 한 번 열리는 이 시험은 임가의 모든 방계 자손들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등급이 낮을수록 재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1등급이면 가문의 보배로 불렸고, 9등급이면 그나마 문턱을 넘은 셈이었다. 0은 존재하지 않는 등급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나는 줄 맨 끝에 서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옷깃 속으로 손을 감췄다. 앞선 아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몇몇은 손을 맞잡고 중얼거리듯 무언가를 빌었고, 몇몇은 애써 태연한 척 딴청을 부렸다. 감응석에 손을 얹으면 그 사람의 혼력에 따라 빛이 피어올랐다. 빛의 색과 숫자가 등급을 결정했다. 시험관은 마당 한쪽에 서서 두꺼운 명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의 목소리는 마당 전체에 울렸다. 그 목소리가 갈라질 때마다 아이들의 등이 움찔거렸다. "임도진, 4등급!" 시험관의 외침에 마당이 들썩였다. 임도진이 감응석에서 손을 떼며 웃었다. 손끝에서 아직도 희미한 잔광이 흩어지고 있었다. 주변 어른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도진이구나. 가주님 핏줄은 다르다니까." 칭찬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고, 누군가는 벌써부터 미래의 가문 서열을 입에 올렸다. 나는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부러움도, 시기도 아니었다. 그저 익숙한 풍경이었다. 다음은 임태식이었다. 감응석에 손을 얹은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빛이 미약하게 피어올랐다. 흐릿한 청색이었다. "임태식, 9등급." 시험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최하위였지만, 그래도 합격선 안이었다. 임태식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가 다시 펴졌다. 적어도 폐물은 아니었으니. 줄이 점점 짧아졌다. 내 앞에 서 있던 아이 하나가 6등급을 받고 물러났다. 그 다음 아이는 7등급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당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이제 남은 것은 나 하나였다. 마침내 내 차례였다. "임진호." 시험관이 내 이름을 불렀다. 명부를 확인하는 그의 손끝이 잠시 멈추는 듯했다. 이름 옆에 적힌 무언가를 다시 읽는 눈치였다. 나는 감응석 앞으로 걸어갔다. 걸음마다 마당의 흙이 신발 밑에서 부스러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등 뒤로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돌은 차가웠다. 손을 얹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도, 진동도, 아무것도 없었다. 감응석은 그저 돌덩이처럼 침묵했다. 시험관이 눈을 찌푸리며 다시 확인했다. 손의 위치를 바꿔보고, 시간을 더 주었다. 결과는 같았다. 돌 표면에 손바닥의 온기만 남았다가 서서히 식어갔다. 시험관은 손목을 살짝 눌러 각도를 바꿔보기도 했다. 그래도 반응은 없었다. 미간의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반응이 없다." 시험관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마당 전체가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조차 멈춘 것 같았다. 곧이어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저게 뭐야, 폐물이잖아!" 비웃음이 곳곳에서 번졌다. 아이들 몇몇이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거렸다. 어른들도 못 이기는 척 입가를 가렸지만, 눈빛에는 이미 조롱이 가득했다. "어차피 잡종 아니었나. 뒷산 노인네가 주워온 애 말이야." "그러니 혼력이 있을 리가 없지." "저런 것도 임가 성을 쓰고 다니는 게 신기하다니까." 말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귓가로 파고드는 말들을 애써 흘려보냈다.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표정은 무너뜨리지 않았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손끝이 감응석 위에서 슬며시 떨어졌다. 손바닥에 남은 냉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나는 그 냉기를 꾹 쥐어 삼켰다. "조용히들 해라." 낮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당을 갈랐다.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박순영이었다. 임서연의 어머니. 임가에서도 알아주는 각박한 성정으로 이름이 났다. 비단으로 지은 옷자락이 걸음마다 서늘하게 스쳤다. 그녀가 나를 훑어보는 눈빛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물건의 값어치를 재는 듯한 시선이었다. "폐물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다. 임가의 성을 쓸 자격조차 없는 아이야." 그녀가 냉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뒷산 노인네가 죽으면 이 아이도 갈 곳이 없어지겠지." 말투에는 감정이랄 게 없었다. 그저 사실을 나열하는 듯한 무심함이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박혔다. 그 말에 마당 뒤편에서 누군가 작게 숨을 삼켰다. 임서연이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그 시선을 알아챈 순간, 임서연은 황급히 눈을 내렸다. 손끝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감응석 앞에서 물러났다. 등 뒤로 웅성거림이 계속 이어졌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발끝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발이 슬쩍 앞을 가로막았다가 비웃음과 함께 치워졌다. 나는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폐물. 잡종. 익숙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조여왔다. 나는 그 감각을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당을 벗어나 뒷산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은 좁고 가팔랐다. 발밑으로 삭은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올라갈수록 임가 본채의 소음이 멀어졌다. 대신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부딪는 소리만이 귓가를 채웠다. 한참을 걷다 보니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산길 중턱에 잠시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임가 본채의 지붕들이 멀리서 반짝였다. 나는 그 풍경을 등지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뒷산 오두막. 박덕수 노인과 함께 살아온 곳이었다. 노인은 나를 거둬 키운 유일한 가족이었다. 혼력이 없어도, 성이 다르다는 소문이 돌아도, 노인은 나를 한 번도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오늘도 노인에게 이 결과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며 걸었다. 걱정하실 게 뻔했다. 애써 웃으며 넘기려 마음을 다잡았다. 오두막 근처에 다다르면 늘 노인이 마당을 쓸거나 장작을 패는 소리가 먼저 들려오곤 했다. 그 소리를 기대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오두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당 한쪽에 장작이 흩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가지런히 쌓여 있어야 할 자리였다. 도끼도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었다.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마당 한가운데. 박덕수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한순간 멈춘 듯했다. 눈앞의 광경이 실감 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할아버지!" 나는 노인을 향해 달려갔다. 무릎이 흙바닥에 부딪혔다. 흙과 자갈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의 안색은 창백했다. 입술은 핏기 없이 말라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숨소리가 위태롭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몸이 축 늘어진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흔들어도, 이름을 불러도,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와 흩어진 장작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서늘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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