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부님 원수는 제가 갚습니다

4화

해가 뜨기 무섭게 이서하는 표국 앞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밤이슬이 옷자락에 스며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제와 달리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걸려 있는 깃발을 살폈다. 표국의 정문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표사들이 짐을 나르며 소리를 질러댔고, 마차 바퀴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란을 피해 이서하는 담벼락 그늘을 따라 조용히 걸었다. 깃발 한쪽 귀퉁이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비늘처럼 겹쳐진 형상, 그 아래로 둥글게 휘어진 선이 이어졌다. 목검의 각인과 비교해보니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뼈대가 되는 무늬는 분명 닮아 있었다. '용의 형상인가.' 이서하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그 깃발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깃발이 펄럭이며 문양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흔들리다가 다시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표국 마당에서 잡일을 하던 늙은 마부 하나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부는 짐을 나르던 손을 멈추고 이서하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거기서 뭘 하는 거요." 마부의 말투엔 경계가 섞여 있었다. "저 깃발의 무늬가 궁금해서요." 이서하는 솔직하게 답했다. 마부는 잠시 그를 훑어보았다. 옷차림이나 검을 보고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치였다. "보통 사람은 저런 걸 궁금해하지 않는데." 마부가 중얼거렸다. "뭔가 사연이 있는 문양인가요." 이서하가 다시 물었다. 마부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건 표국 문장이 아니야. 원래 있던 것이지." 그가 말했다. "원래 있던 거라면요." 이서하가 물었다. "이 표국 자리는 삼십 년 전에는 다른 문파의 땅이었어. 묵룡회라고, 이 지역을 꽤 오래 주름잡았던 자들이지." 마부가 답했다. "묵룡회." 이서하는 그 이름을 되새겼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입 안에서 그 이름을 몇 번이나 굴려보았다. 낯선 발음인데도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 +++ 마부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는 짐을 다시 어깨에 걸치며 몸을 반쯤 돌렸다. 언제든 이 대화를 끊고 자리를 뜰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였다. "그때 큰 사고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어. 문파 전체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더군. 살아남은 자들 중 몇몇이 이 근방 산으로 숨었다는 소문도 있었지." 그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산으로 숨었다면..." 이서하의 심장이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산이라면 어느 쪽입니까." 이서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그것까진 나도 정확히 모르지. 이 근방이라 해도 산은 한둘이 아니니까." 마부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진 나도 몰라. 어릴 적 들은 얘기니까." 마부가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떴다. 더 캐물으면 위험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당 안쪽으로 사라졌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이서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생각을 정리했다. 곽태산이 이름을 감추고 산에 들어갔다는 소문. 목검에 새겨진 각인. 그리고 묵룡회라는 이름. '사부님이 그 문파와 관련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그렇게 자문했다. "산 아래 일에는 관심 두지 말라." 곽태산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제자를 향한 걱정이라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게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에, 숨기고 있었을지도. 이서하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건드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사부의 등에 새겨진 흉터, 밤마다 홀로 검을 손질하던 뒷모습, 산 아래로 내려가길 꺼려하던 태도. 그 모든 것이 이제와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 이서하는 그날 하루를 저잣거리에서 보냈다. 옛일을 아는 사람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았다. 찻집, 포목점, 대장간까지 가리지 않고 물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대부분은 삼십 년 전 일을 모른다며 손을 저었고, 몇몇은 아예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묵룡회? 그런 게 있었나." 포목점 주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모르는 게 낫소. 옛날 일 캐고 다니다가 좋은 꼴 못 보는 사람 여럿 봤으니." 대장간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이서하를 쫓아내듯 손짓했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갈 때까지 뚜렷한 답을 얻지 못했다. 발바닥이 아파올 정도로 저잣거리를 헤맸지만, 남은 것은 지친 다리와 초조함뿐이었다. 그러다 저녁 무렵, 낡은 약방 앞에서 지팡이를 짚은 늙은 행상을 만났다. 약방 문 앞에 걸린 등불이 흔들리며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비췄다. 그는 오래된 약재 상자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이서하를 올려다보았다. "묵룡회?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군." 행상은 놀란 눈으로 이서하를 바라보았다. "들어보셨습니까." 이서하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들어본 정도가 아니지. 그 사고로 내 형이 죽었으니까." 행상의 눈에 옛 기억이 스쳤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어떤 사고였습니까." 이서하가 물었다. "내부 반란이었다고들 하지. 문파 안의 누군가가 배신을 했다더군. 그날 밤 불이 나고,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어." 행상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불이라니,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이서하가 다시 물었다.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다만 그날 밤 하늘이 온통 붉었다는 얘기만 들었어. 마을 사람들이 다 그 불빛을 봤다더군." 행상이 씁쓸하게 웃었다. "살아남은 자는요." 이서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몇몇이 도망쳤다는 얘기는 있었지만, 다들 죽었다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대단한 일이겠지." 행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 배신자가 누구였는지는 아십니까." 이서하가 물었다. "그건 아무도 몰라. 살아남은 자들이 다 흩어져서 입을 다물었으니까. 아니, 살아남은 자체가 드물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행상이 지팡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이서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부님이 그 살아남은 자들 중 한 명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곽태산의 명성이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사부가 그 사고의 생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동시에 그를 흔들었다. 행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약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서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어둠이 서서히 저잣거리를 덮어갔다. +++ 밤길을 되돌아가는 동안, 이서하는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붙고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딱 그만큼만 가까워지는 걸음이었다. '미행이다.' 그는 곧바로 알아챘다. 발소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했다. 마치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확신하는 걸음걸이였다. 걸음을 늦추지 않고 골목 하나를 돌았다. 발소리도 함께 방향을 틀었다. 객잔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면 안전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상대의 정체를 확인할 기회도 놓치게 된다. '차라리 상대를 끌어내는 게 낫다.' 이서하는 그렇게 판단했다. 대신 좁은 뒷길로 들어서며 목검의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뒷길은 좁고 어두웠다. 담벼락 사이로 스며든 달빛만이 겨우 길을 밝혔다. 발밑에서 자갈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서하는 숨을 낮추고 걸음을 옮겼다. 달빛 아래,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하나가 골목 어귀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걸음에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쉭- 그림자의 옷자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저것이 자객이라는 것인가.' 이서하는 처음 마주한 낯선 기도에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목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림자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왔다. 걸음마다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가 이서하의 심장 박동과 겹쳐지듯 점점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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