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한무영을 반죽음으로 만든 다음 날, 궁 안은 완전히 뒤집혔다.
아침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문을 열고 나서기도 전에 복도를 지나는 궁녀들의 발소리부터 달랐다. 평소라면 조용히 지나갈 것을, 오늘은 두세 명씩 붙어 다니며 소곤거렸다. 나는 세수를 하다가도 그 소리에 자꾸 귀를 기울였다.
춘심의 말로는 오전 내내 궁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병약하던 대황자가 갑자기 강기를 뿜었다더라, 삼황자 쪽 무사가 피를 토하며 실려 갔다더라. 소문은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져서, 이제는 내가 하룻밤 사이에 절세고수가 됐다는 식으로 돌고 있었다.
"어제 그 무사가 삼 년 전 남쪼국 무술대회 준결승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래요."
춘심이 옷매를 정리해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헛기침을 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을 반죽음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의원이 붙어서 겨우 숨만 붙여놨다고 하더라고요. 마마 덕분에 의원 밥벌이 좀 하겠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투였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냥 넘겼다.
삼황자 쪽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넣었다는 얘기도 들렸지만, 서귀비가 미리 손을 써서 조용히 덮었다고 했다. 정확히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렀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뭘 얼마나 갖다 바쳤을까."
"제가 어떻게 알아요. 다만 어제저녁에 서귀비마마 궁에서 가마 세 대가 밤늦게 빠져나갔다는 얘기는 있어요."
가마 세 대. 그게 뭘 뜻하는지는 몰라도 절대 적은 값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셈해보다가 이내 관뒀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문제는 삼황자의 생일 연회가 그대로 강행됐다는 것.
"이 상황에 연회를 열어요?"
"체면 문제입니다. 취소하면 그건 겁먹었다는 뜻이 되니까요."
춘심의 설명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 반죽음으로 만들어놓고도 생일잔치는 열겠다는 그 오기가 참 대단했다. 이 궁 안 사람들의 체면이라는 건 목숨보다 무거운 모양이었다.
"나도 가야 해?"
"당연하죠. 안 가면 그게 더 큰 소문이 됩니다."
결국 나는 관복을 갖춰 입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걸음마다 배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낄낄거리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또 무슨 짓을 벌일까, 하는 기대감이 섞인 웅얼거림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려 애썼지만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연회장은 화려했다. 등불이 정원 곳곳에 걸려 있었고, 악사들의 연주가 은은하게 깔렸다. 붉은 비단이 나무마다 드리워져 있었고, 향로에서 올라오는 향내가 코를 찔렀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구석 자리를 잡았지만, 이미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다들 궁금한 게 분명했다. 저 병약한 대황자가 진짜 강기를 뿜을 수 있는지, 아니면 그냥 요행이었는지.
몇몇은 아예 대놓고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나는 못 들은 척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삼황자 이헌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소문으로 듣던 대로 훤칠하고 위압적인 인상이었다. 검은 예복 위에 금실로 수놓은 용 문양이 촛불에 번쩍였다. 나를 향한 눈빛에 노골적인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대황자 형님, 몸이 다 나으셨나 봅니다."
"덕분에."
짧게 응수하고 자리를 지켰다.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이헌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딘지 계산적이었다. 저 사람도 나만큼이나 셈이 빠른 인간이라는 게 첫눈에 느껴졌다.
대신 나는 눈앞에 차려진 음식에 집중했다. 용멸패원공을 흡수한 이후로 폭식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연회 음식들을 보니 다시 그 갈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위장 어딘가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배고픔이라고 하기엔 너무 원초적이고, 허기라고 하기엔 너무 집요했다.
결국 체면 따위 내려놓고 눈앞의 요리들을 순서대로 비워갔다. 오리찜, 전병, 절인 채소, 국수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이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럴 때 체면을 차리다간 배 속의 목소리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그때 누군가 옆자리에 슬쩍 앉았다.
소녀였다. 열여섯이나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나이였고, 머리 위쪽으로 작은 양의 뿔 같은 것이 자라 있었다. 옷차림은 궁녀들과 비슷했지만, 어딘지 색이 조금 진하고 무늬가 낯설었다. 인간이 아닌 게 확실했지만, 연회장의 다른 이들은 그런 걸 신경도 안 쓰는 듣한 모습이었다.
"오빠, 며칠 굶었어요?"
갑작스러운 반말에 나는 젓가락질을 멈췄다.
"...뭐?"
"그렇게 먹는 거요. 사람이 저렇게 먹으려면 최소 사흘은 굶어야 할 텐데. 아니면 뭐 큰 병에 걸렸거나."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뜯어봤다. 눈빛에 순수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벌레를 관찰하는 아이 같았다.
"넌 누구냐."
"소하요. 그냥 구경하러 왔어요. 여기 연회 재밌잖아요. 사람들 표정 보는 게 취미거든요."
뿔이 있는 게 보이는데도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상황이 이상해서 물어보려는데, 소하가 먼저 말을 이었다.
"다들 못 봐요. 제가 보여주고 싶은 사람만 보이거든요."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단순한 소녀가 아니었다. 상당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었다. 나는 주변을 슬쩍 돌아봤다. 정말로 아무도 소하 쪽을 특별히 쳐다보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던 사람처럼 취급했다.
"왜 나한테 보여준 거지?"
"신기해서요. 오빠 안에 뭔가 되게 이상한 게 들어 있어요. 배가 고픈 것도 그거 때문이죠?"
소하의 시선이 정확하게 내 몸속, 그 낮은 목소리가 나오는 지점을 향했다. 이 아이가 뭘 알고 있다는 게 확실했다. 심장이 한 번 쿵 뛰었다.
"그게 뭔지 알아?"
"조금은요. 정확히는 몰라요. 근데 그런 거 삼킨 사람 처음 봐요. 보통은 그런 거 삼키면 그 자리에서 죽거든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죽는다는 말이 이렇게 태연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어쨌든요, 오빠가 궁금해하면 알려드릴 수도 있어요. 대신..."
소하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제 부탁 하나 들어주세요. 나중에요. 언제가 될지는 저도 몰라요."
조건 없는 정보 제공이 아니었다. 뭔가 대가가 필요하다는, 딱 이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그 원칙이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했다. 나는 잠깐 계산했다. 이 아이의 정체도 모르는데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는 게 맞나. 부탁이라는 게 사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종류일 수도 있고, 그냥 심부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몸속의 그 목소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처럼 보였다.
"조건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승낙해."
"그건 오빠가 잘 생각해야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말투는 애 같은데 하는 말은 늙은이보다 노회했다. 나는 이 아이가 최소한 겉보기 나이만큼 어리지 않다는 걸 확신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요."
소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뿔 달린 머리를 살짝 흔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빠 재밌어요. 또 봐요."
그 말과 동시에 소하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정말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못 본 듯 태연했다. 나는 방금까지 그 자리에 누가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공기에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나는 방금 벌어진 일을 곱씹으며 다시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접시가 비어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절반쯤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훔쳐 먹은 건가, 아니면 그 아이가 뭔가 짓을 벌인 건가.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쁜 일이었다.
"저, 저기요..."
시중을 들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속삭였다.
"대황자마마, 방금 그... 옆에 앉으셨던 분은 누구신지..."
다들 소하를 보긴 봤다는 뜻이었다. 다만 뿔은 못 봤을 뿐. 이상한 아이라고만 여기는 듯했다. 나는 시녀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아이다. 신경 쓰지 마."
시녀는 더 묻지 않고 물러났다. 그 표정에 남은 의심은 그대로였지만, 굳이 파고들 배짱은 없어 보였다.
순간 연회장 저편에서 삼황자 이헌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눈빛에는 이전의 경계심과는 다른, 뭔가 새로운 계산이 담겨 있었다. 마치 방금 벌어진 일을 그가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이헌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배 속의 목소리가 낄낄대며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늘 밤, 뭔가가 시작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대체로, 나쁜 쪽으로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