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4화. 강기
"좋다."
한무영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그 여유가 가짜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이 진짜 여유가 있을 때는 표정을 굳이 고쳐 짓지 않는다. 방금 것은 무너진 걸 서둘러 다시 쌓은 얼굴이었다.
"그럼 목검을 하나 준비해드릴까요, 아니면..."
"필요 없다."
나는 맨손을 들어 보였다. 사실 목검을 어떻게 쥐는지도 몰랐다. 시스템으로 습득한 건 심법과 초식의 정보였을 뿐, 실전 감각까지 자동으로 붙는 건 아니었다. 무기를 드는 순간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검을 쥐고 엉거주춤 서 있는 병약한 대황자라니, 그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럴 바엔 맨손이 나았다. 맨손이면 최소한 어설픈 자세를 들킬 일은 없으니까.
춘심이 뒤에서 소매를 붙잡았다.
"마마,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삼황자님 직속 무사예요.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입니다."
"알아."
"모르시잖아요! 예전엔 팔씨름도 저한테 지셨는데..."
춘심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 이 아이는 정말 원래의 이겸을 아끼는 것 같았다. 그 진심이 조금 미안하면서도, 지금은 다른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팔씨름 얘기는 또 왜 지금 나오나. 그때의 이겸과 지금의 나는 몸만 같고 나머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춘심은 그 사실을 모른다. 알려줄 방법도 없었다.
한무영이 목검을 들고 마당 중앙으로 걸어왔다. 나도 맞은편에 섰다.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애초에 다치게 할 생각으로 온 것이 확실해졌다. 발끝이 땅을 딛는 소리부터 달랐다. 걸음마다 무게가 실려 있었고, 그 무게는 위협을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았다. 몸을 다치게 하면 삼황자 쪽에서 뭘 얻는지, 얻는 게 없다면 이건 그냥 개인적인 감정싸움인지. 어느 쪽이든 지금 내 몸은 그 계산과 상관없이 얻어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먼저 갑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빠른 속도였다. 예전의 이겸이었다면 그대로 맞았을 속도였다.
그런데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발이 반보 물러나고 상체가 살짝 틀어지면서 목검의 궤적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로 계산한 게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한 느낌이었다. 용멸패원공의 정보가 실제로 몸에 새겨졌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가는 감촉이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광대뼈가 나갔을 거리였다.
한무영의 눈이 커졌다.
"...피했다?"
"그러게, 나도 신기하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속으로는 긴장이 극에 달해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한 번 피했다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무영이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며 자세를 낮췄다. 이번엔 진심이 담긴 살기였다.
"장난이 아니었나 보군."
말투가 바뀌었다. 존댓말이 반쯤 벗겨지고 날이 섰다. 사람은 화가 나면 말투부터 무너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그의 목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이번엔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묵직했다. 피할 수 있는 궤적이 아니었다. 몸이 저절로 반응해서 팔을 들어 막았는데, 그 순간 손끝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쩌엉!
둔탁하고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목검이 그대로 부러졌다. 한무영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며 손목을 부여잡았다. 팔뚝에는 핏줄이 터진 듯 붉은 자국이 번져 있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무언가 뜨겁고 단단한 것이 손바닥을 타고 지나간 감각이었다.
주변이 순간 고요해졌다.
내 손끝에서 나온 게 뭔지 나도 정확히 몰랐다. 다만 시스템 창에 짧은 문구가 떠 있는 걸 확인했다.
[강기 발현 확인. 축하합니다.]
강기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알고 있었다. 지식은 시스템이 넣어줬으니까. 하지만 그 지식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이 세계에서 무공 실력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다룬다는 그 힘. 십 년, 이십 년을 갈고닦아도 문턱에도 못 가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그 힘이, 이제 막 접속한 지 며칠 된 몸에서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는 게 말이 되나.
춘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보고서야 이게 얼마나 큰 사건인지 짐작이 갔다. 춘심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팔씨름 얘기를 하던 애가 지금은 유령을 본 표정이었다.
한무영은 부러진 목검을 내려다보다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빛에 두려움과 계산이 뒤섞여 있었다. 저 계산이 어디로 튀는지가 문제였다. 여기서 물러나느냐,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한 번 더 들이받느냐.
"이런... 미친."
그가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목이 나갔는지, 아니면 그냥 놀란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상태로 다시 공격할 수 있는 몸은 아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이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머리로 판단한 게 아니라 근육이 스스로 움직였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럴 땐 생각보다 몸이 낫다는 걸 실감했다. 생각했으면 분명 망설였을 거리였다.
손바닥이 그의 가슴팍에 닿는 순간, 다시 그 기운이 폭발했다.
콱!
한무영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마당 흙바닥에 처박힌 그는 피를 토하며 꿈틀거렸다. 죽지는 않았지만, 반죽음 상태라는 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흙바닥에 붉은 얼룩이 번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이게 다행인지 큰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곧 취소해야 했다. 삼황자 직속 무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이건 다행일 수가 없었다.
마당이 완전한 정적에 휩싸였다.
처소 밖에서 이 소란을 듣고 몰려온 궁인들이 하나둘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낮게 번졌다. "저게 정말 대황자야?" "그 병약하다던?" 같은 말들이 바람에 실려 이쪽까지 들려왔다.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서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숨기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이제 궁 전체에 퍼질 것이다. 병약했던 대황자가 삼황자의 무사를 반죽음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이. 하루도 안 걸릴 것 같았다. 저 담장 너머 눈들 중 절반은 벌써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춘심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마마... 방금 그거, 정말 마마가 하신 거예요?"
"내가 봐도 신기하다."
"신기하다니요, 지금 이게 신기하다고 넘어갈 일이 아니잖아요! 강기예요, 강기! 궁에서 강기 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아세요?"
춘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걱정과 흥분이 뒤섞인 말투였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몇 명인지 나도 모른다. 아는 건 이제부터 내가 그 몇 명 중 하나로 분류될 거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도 아직은 모른다는 것.
몸 안 깊은 곳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엔 뭔가 다급하고 끊긴 채로.
'...그 힘... 어디서... 나온 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뭔가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평소엔 능글맞게 말을 걸어오던 녀석이 이번엔 문장을 채 끝맺지도 못했다. 저놈도 놀랐다는 뜻인가, 아니면 알고 있는데 말을 못 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한무영은 흙바닥에서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쓰러졌다. 데려가야 할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저러다 진짜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 이 마당에서 그를 부축해줄 사람은 나도 아니고 춘심도 아니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었다. 다만 저 사람이 살아서 삼황자에게 뭐라고 보고할지가 문제였다.
담장 너머 웅성거림 사이로,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이 느껴졌다. 여러 명이 함께 움직이는 발소리,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오는 걸음이었다.
삼황자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벌써 듣고 온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