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대회가 끝난 뒤, 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백두파에 정식으로 입문시키겠다."
"그렇게 급하게 결정하실 일입니까."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눈에는 더 이상 무시가 없었다. 대신 상단주로서의 계산만이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서류를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예전에는 나를 향해 던지던 그 눈빛이, 이제는 장부를 훑을 때의 눈빛과 똑같아졌다.
"백두파 쪽에 이미 사람을 보냈다. 절차만 남았다."
"제 뜻은 물으시지도 않고요."
"네 뜻이 무엇이든, 이보다 나은 길은 없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윤서연은 그 뒤로도 몇 번 마주쳤다. 복도에서 스치거나, 상단 마당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정도였다. 그녀는 매번 짧게 인사만 건네고 자리를 떴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시선은 오래 두지 않았다. 소하는 여전히 나를 의심 어린 눈으로 살폈다. 마주칠 때마다 뭔가 캐물으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백도경은 그날 이후 조용했다. 도발도, 인사도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어떤 칼은 소리를 내지 않고 갈리는 법이었다.
녹죽파는 신설된 세력이면서도 벌써 백두파, 청룡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했다. 세워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세력이 벌써 그 정도 위세를 부린다는 건, 뒤를 받쳐주는 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뒤에는 백강산의 이름이 있었다.
청룡문 대고수, 초일봉의 절대자.
귀동냥으로만 들어왔던 그 이름이 이제는 코앞의 일이 되어 있었다. 무림첩 한 귀퉁이에 스치듯 적혀 있던 이름이, 이제는 내 앞을 막아서는 벽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상단 회합에 참석한 자리에서 낯선 소문을 들었다.
"이번 무림 연맹 맹주 선출이 예년보다 앞당겨졌다는군."
"청룡문 쪽에서 그렇게 밀어붙였다지."
"밀어붙일 힘이 있으니 밀어붙이는 게지."
옆자리 상인들이 낮게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나는 술잔을 든 채 듣기만 했다.
맹주 자리를 두고 벌어질 경쟁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십 년 후 마황이 강림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밤, 나는 서책을 꺼내 다시 펼쳤다. 종이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유광감응술의 대가라는 문구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붓끝으로 그은 글자 하나하나가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급한 게 있었다.
녹죽파를 흔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도경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백강산을 끌어내야 했다. 백도경은 손끝일 뿐, 진짜 손아귀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미래에서 온 자다. 아무도 모르는 정보를 하나 쥐고 있다.
백두파의 몰락이, 서은호라는 이름으로 시작된다는 사실.
아직은 누구도 그 이름을 모른다. 십 년 뒤에야 세상에 알려질 이름이었다.
그것을 슬쩍 흘리면, 판이 어떻게 뒤틀릴지 궁금했다. 손안에 든 불씨 하나를 어디에 던져야 가장 크게 번질지, 그것만 고르면 됐다.
다음 날, 백두파 장로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아버지가 마련한 자리였다.
"괜한 소리는 삼가라. 인사만 드리고 나오면 된다."
"그럴 생각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장로들 앞에서 나는 짧게 입을 열었다.
"혹시 서은호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순간, 장로들의 얼굴색이 하나같이 변했다. 방금까지 웃음을 걸고 있던 입가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느냐."
목소리에는 놀람보다 두려움이 먼저 묻어 있었다.
판이 이제 막 커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