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했던 살인귀

5화

총단 인근의 저잣거리는 밤이 되어도 소란스러웠다. 등불이 하나둘 켜지고, 술 냄새와 기름진 음식 냄새가 뒤섞여 거리를 가득 채웠다. 준하는 며칠째 이곳을 떠돌며 정보를 캐고 있었다. 무림맹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맹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나까지 멈춰 설 수는 없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강호의 진실은 대전(大殿)이 아니라 저잣거리에 있다고. 관과 문파의 기록은 다듬어지지만, 술꾼의 입은 다듬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준하는 그 말을 되새기며 벌써 사흘째 같은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주루 앞에 서니 벌써 세 번째 걸음이었다. 안에서는 취객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사이로 늙은 점소이가 손님 사이를 오가며 술병을 나르고 있었다. "흑풍곡 근처에서 죽은 그 강자 말이오?" 주루의 늙은 점소이가 술잔을 닦으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 말투에는 성의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마치 매일 듣는 뻔한 질문을 상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예. 서무천이라고 합니다." 준하가 은자 몇 닢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점소이의 눈이 반짝였다. 손님이 바뀌자 태도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걸레짝을 쥐고 무심히 잔을 훔치던 손이, 은자를 보자마자 잽싸게 움직였다. "아, 그 어른 말씀이시군요! 물론 알지요, 알다마다요." 점소이가 은자를 재빨리 거둬들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흑풍곡 근처라면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도는 곳입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준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변의 술꾼들이 흘낏거렸으나, 그들의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천·지·인 삼부로 나뉜 기서, 황극경세서라는 것이 있다지요." 준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황극경세서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점소이가 주위를 살피며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 엿듣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수백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기서 중 천명서라는 것을 손에 넣은 자가 있었는데, 그 힘에 잠식되어 수천만을 학살했다고 하지요. 그 후로 기서는 자취를 감췄다는데... 요즘 그것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흑풍곡 인근에서 돌고 있습니다." 준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서무천은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런 이가 흔적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상대가 인간의 무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지녔다는 뜻이었다. "확실한 이야기입니까." 준하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탁자 아래 놓인 손은 이미 주먹을 쥐고 있었다. "소인이야 그저 떠도는 말을 전할 뿐입니다. 하지만 흑풍곡 인근에서 실종된 무인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몇이나 됩니까." "확실히는 모르오만... 벌써 여럿이라 들었소이다. 하나같이 실력깨나 있다는 이들이었는데, 그 근방에 들어간 뒤로 소식이 끊겼다지요." 점소이는 말을 마치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더는 캐묻지 말라는 듯한 몸짓이었다. 준하는 점소이에게 은자를 더 얹어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리로 나서니 밤바람이 서늘하게 목덜미를 스쳤다. 저잣거리의 소란은 여전했지만, 준하의 머릿속은 온통 흑풍곡으로 향해 있었다. +++ 다음 날, 준하는 흑풍곡 인근 마을을 다시 찾았다. 새벽부터 걸음을 재촉한 탓에, 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마을 촌장을 만났다. 촌장의 집은 마을 초입에 있었다. 낡은 사립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내 늙수그레한 얼굴이 빼꼼 나왔다. "서무천 대협의 시신이 발견된 곳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준하가 정중히 청했다. 촌장은 처음엔 경계했다. 낯선 젊은이가 대뜸 그런 청을 해오니 의심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준하가 청란의 옥패를 보이자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옥패를 알아본 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림맹과 연이 닿은 자임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곳은... 안내는 해드리겠소만, 오래 머물지는 마시오. 요즘 그 근방에서 실종자가 셋이나 나왔소." "실종자라니요." "밤마다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는 말이 있소. 몇몇은 그것을 보고 도망쳐 나왔는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다시는 그쪽으로 가지 않겠다더군." 촌장은 말을 하면서도 연신 문밖을 살폈다. 마치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화를 부를까 두려운 듯한 태도였다. "그중 하나는 아직도 넋이 나가 있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밤마다 헛소리를 지껄인다더군." 준하는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단순한 흉수가 아니다. 사람의 정신을 그렇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촌장은 지팡이를 짚고 앞장서서 걸었다. 걸음이 느렸지만, 그마저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준하는 촌장을 따라 흑풍곡 안쪽으로 향했다. 숲은 갈수록 어두워졌고, 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조차 점점 희미해져, 마치 해가 저물어 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벌레 우는 소리조차 없었다. 오직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이 근방부터가 이상하오. 짐승들도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지." 촌장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준하는 대답 없이 주위를 살폈다. 나무껍질에는 이상하리만치 검은 얼룩이 배어 있었고, 흙바닥은 유난히 메말라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오." 촌장이 손끝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서무천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자리였다. 준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땅을 살폈다. 흙 위에 검붉게 마른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흙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오래된 핏자국이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당시의 참혹함이 짐작되었다. '아버지,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마주하신 겁니까.' 어릴 적, 서무천은 늘 검을 쥐는 법보다 물러설 때를 아는 법을 먼저 가르쳤다.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상대의 무공이 아니라, 상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준하는 그 가르침을 되새기며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저 스산함뿐,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촌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 이보시오,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스산한 기운이 숲 저편에서 밀려왔다. 쏴아아- 나뭇잎이 일제히 흔들리며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촌장은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지팡이도 챙기지 못한 채였다. "나, 나는 모르오! 나는 그저 안내만 했을 뿐이오!" 그 외침을 뒤로하고 촌장의 발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준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지 마라. 아버지도 이곳에서 그러셨을 것이다.' 숲 그늘 사이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형체는 사람과 흡사했으나, 그 기세는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 마치 존재 자체가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준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런 기운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마주했던 그 어떤 고수의 기도와도 달랐다.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가 짓누르는 듯한 무게였다. "...누구십니까." 준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손끝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준하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주변의 나무들이 삐걱거리며 휘어졌다. 마치 그 존재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드득- 나뭇가지 하나가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떨어졌다. 준하는 검집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검을 뽑아야 하는가. 아니면 물러서야 하는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상대의 정체도, 무공의 근원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검을 뽑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등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예감이 온몸을 옥죄었다. '이것이 아버지를 죽인 그것인가.' 그림자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준하와의 거리는 이제 열 걸음 남짓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숲 전체가 숨을 죽인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림자의 형체 사이로 두 개의 붉은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 눈빛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심연 그 자체가 두 개의 점으로 응축된 듯한,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이었다. 준하는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뒷걸음질 칠 여유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퇴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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