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장례는 사흘 뒤 서씨 가문 본가에서 치러졌다.
본가의 대청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향 내음이 짙게 깔린 마당에는 검은 상복을 입은 조문객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곡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준하는 알고 있었다. 저 곡소리 중 진심에서 우러난 것은 몇이나 될지.
조문객은 많았지만, 진심으로 슬퍼하는 이는 드물었다.
"서무천도 결국 저렇게 되었구먼."
문상 온 원로 한 명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향이 들려 있었으나, 눈빛에는 애도보다 호기심이 짙었다.
"한때는 천하를 호령하던 자였는데 말일세."
옆에 있던 다른 원로가 맞장구쳤다.
"세력을 잃으면 다 저 꼴이지. 요즘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그러게 말일세. 살아생전 그리 대단하던 위세도, 죽고 나니 이 정도로구먼."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어조에 담긴 것은 조롱에 가까웠다. 몇몇은 부의금을 내밀며 형식적인 인사만 건네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마치 오래 머물다가는 자신에게도 불운이 옮을까 두려운 사람들처럼.
준하는 그 말들을 전부 들었다. 상복을 입고 영전 앞에 앉아 있던 그의 귀에, 조문객들의 수군거림이 고스란히 박혔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눈앞을 흐렸지만, 귀만큼은 또렷했다.
'세력을 잃었다니. 아버지가 몰락하셨다는 말인가.'
준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몇 해 전부터 발길을 끊은 것도, 갈수록 소식이 뜸해진 것도, 어쩌면 단순한 사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조짐은 있었다. 아버지가 보내던 서신의 필체가 점점 흐트러졌던 것도, 지난 명절에 보내온 선물이 예년보다 부실했던 것도. 그때는 그저 바쁘신가 보다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몰락의 흔적이었다.
'아버지는 왜 그것을 말씀해주지 않으셨을까.'
준하의 손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상복의 소매 자락이 구겨졌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힘든 일은 혼자 짊어지고, 아들에게는 웃는 얼굴만 보이셨다. 강함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당신이 약해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이신 적이 없었다.
조문이 끝나갈 무렵, 서씨 가문의 장로가 준하를 불렀다.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다가온 그의 얼굴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으나, 그 위엄 아래로 피로한 기색이 감춰져 있지 않았다.
"준하야, 이제 네가 가문을 이어야 한다."
장로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복수는 생각하지 말거라. 무림맹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야."
준하는 고개를 들어 장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조문객들 사이에서 오갔던 조롱의 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장로님께서는 아버지의 죽음이 이대로 묻히길 바라십니까."
"말버릇이 그게 무어냐! 어른이 말씀하시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준하가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비웃고 계시지 않습니까."
장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마당 저편에서 원로들의 수군거림이 다시 들려왔고, 그 소리는 장로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가문의 체면이 있다."
장로가 겨우 말을 이었다.
"네가 나서서 소란을 피우면 서씨 가문의 위신이……."
"위신이라 하셨습니까."
준하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냉기가 서렸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그 위신을 지켜준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위신을 논하십니까."
장로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것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노여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준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영전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청을 나섰다.
+++
그날 밤, 준하는 청하란을 찾아갔다.
계곡의 처소는 여느 때와 같이 고요했다. 등불 하나만이 은은하게 방 안을 밝히고 있었고, 청하란은 이미 준하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차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부님. 저는 하산하겠습니다."
청하란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무림맹으로 가겠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유냐."
청하란의 눈이 준하를 꿰뚫듯 응시했다.
준하는 잠시 침묵했다. 등불의 불빛이 그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아니요. 범인을 찾으면, 제 손으로 갚아줄 생각입니다."
청하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복수는 사람을 갉아먹는다, 준하야. 네 아버지도 그것을 알았기에……."
"압니다."
준하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저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한 자만이 지킬 수 있고, 지키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몰랐다. 지금은 뼈에 사무쳤다.
아버지는 그 말을 하며 늘 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그때의 손길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지금에서야 사무치게 그리웠다.
"장로들은 뭐라 하더냐."
청하란이 물었다.
"복수는 생각지 말라 하더군요. 무림맹에서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준하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스쳤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진심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청하란은 오랫동안 준하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도 무거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려도 소용없겠구나. 그렇다면 이것을 가져가거라."
그녀는 품에서 작은 옥패를 꺼내 준하에게 건넸다. 옥패의 표면에는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내 이름을 대면 무림맹에서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준하는 옥패를 받아 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스며들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진뢰가 며칠간 동행할 것이다. 그것까지는 거절하지 말거라."
준하는 그것만은 거절하지 않았다. 진뢰라면 믿을 수 있었다. 스승의 오랜 벗으로 계곡을 자주 드나든 그를, 준하는 어린 시절부터 믿고 따랐다.
"길을 나서기 전에 하나만 묻자."
청하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찾는 것이 진실이냐, 아니면 복수의 대상이냐."
준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둘 다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겨우 답했다.
청하란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만 준하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을 뿐이었다. 그 손길에서 스승의 걱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
다음 날 새벽, 준하는 짐을 꾸려 계곡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새벽 공기 속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자란 오두막을 눈에 담았다. 유년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인 자를 반드시 찾아낸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것이 그가 계곡을 떠나며 품은 유일한 다짐이었다.
진뢰가 말없이 뒤를 따랐다. 준하가 곁눈질로 살핀 그의 표정에는 걱정과 착잡함이 뒤섞여 있었다. 아직 열여덟에 불과한 준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다.
진뢰는 몇 번이나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준하의 걸음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계곡을 벗어나자 넓은 관도가 펼쳐졌다. 준하가 처음으로 밟아보는 세상 밖의 길이었다. 흙먼지가 이는 길 위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았고, 저 멀리 마을의 지붕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준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계곡 안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이 넓은 세상은 낯설고도 막막했다.
"괜찮으냐."
진뢰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준하가 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옅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
그 길 끝에서,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무림맹이라는 곳이 그가 상상했던 정의의 상징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곳인지를.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하게 될 진실이, 그의 다짐을 얼마나 흔들어놓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