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무림맹 총단은 거대했다.
높이 솟은 전각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붉은 기와가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그 사이를 오가는 무인들의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검을 찬 자들은 검집 끝을 스치듯 걷지 않았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지나가는 자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했다.
준하는 정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여기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되뇌었다. 아버지의 죽음, 그 죽음을 덮으려는 자들,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진실. 무림맹이라면, 정도의 총본산이라면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진뢰는 총단 초입까지만 동행했다.
"나는 여기서 처리할 일이 있다. 안에서는 조심하거라."
그의 목소리는 짧았지만 눈빛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준하는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는 정문을 넘기도 전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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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지키는 문지기 둘이 준하를 막아섰다.
창을 든 자세는 느슨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준하를 위아래로 훑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용무가 무엇이냐." 문지기 하나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시선은 준하가 아니라 그의 낡은 의복에 가 있었다.
"서무천의 사건을 조사하고자 왔습니다. 담당자를 뵙고 싶습니다."
문지기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실소를 흘렸다.
쉭- 하고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실소를 덮어주지는 못했다.
"서무천? 아, 그 몰락한 늙은이 말이냐."
"저희 아버지십니다." 준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버지라...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문지기가 팔짱을 끼며 조롱조로 웃었다.
"그런 자의 죽음까지 우리가 신경 써야 하냐?"
준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화를 내면 진다.' 스승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분노는 판단을 흐리는 안개와 같다.'
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품에서 옥패를 꺼냈다.
"청하란 대협의 제자입니다. 담당 조사관을 만나야겠습니다."
문지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곧 다시 냉소로 돌아갔다.
"청하란? 그 이름 팔아먹는 놈들이 요즘 한둘이 아니지."
"진짜 제자라면 증표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준하는 옥패를 내밀었다. 문지기는 그것을 대충 훑어보더니 코웃음 쳤다.
손끝으로 옥패의 무늬를 툭툭 건드리는 동작조차 성의가 없었다.
"이런 건 시장에서도 만들 수 있다. 애송아, 청하란 대협이 정말 신급 명사인지도 요즘은 의심스러운 판인데."
준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소문 못 들었나? 청하란의 신급 명사 자리, 사실은 옛 전공만 우려먹는 거란 말이 파다하다. 요즘 실력을 제대로 보인 적이 없다지 아마."
다른 문지기가 옆에서 거들었다.
"내 사형 말로는, 벌써 몇 년째 비무 한 번 안 하셨다더라. 실력이 죽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명성이 거품이었는지."
준하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스승이 실제로 힘을 쓰는 모습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언제나 온화한 가르침뿐이었다. 차 한잔 앞에 두고 검리를 논하던 모습, 마당에서 자세를 잡아주던 손길. 그러나 진짜 강함을 증명하는 장면은,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사부님의 명성이 거짓이란 말인가.'
그 생각이 들자 발밑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믿어온 것 하나가 흔들리자, 다른 모든 것도 함께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도, 스승의 가르침도, 자신이 딛고 선 이 세상의 이치까지도.
"그만 돌아가거라. 여기는 애송이가 함부로 드나들 곳이 아니다." 다른 문지기가 손짓하며 준하를 밀어냈다.
그 손짓에는 하찮은 것을 치우는 듯한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준하는 물러서지 않았다.
"조사관을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허, 고집도 세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하루 종일 서 있어보든가."
문지기들은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서서 딴청을 부렸다.
하나는 창대에 몸을 기댄 채 하품을 했고, 다른 하나는 지나가는 무인에게 알은체를 하며 실없는 농을 주고받았다.
준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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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하는 정문 앞에서 한나절을 기다렸다.
아침의 서늘함이 가시고, 해가 정수리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아무도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다리는 이미 감각이 무뎌진 지 오래였다. 서 있는 자세를 바꿀 때마다 저릿한 통증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나가는 무인들 몇몇이 그를 흘깃거리며 수군거렸다.
"저 자가 서무천의 아들이라던데."
"쯧쯧, 아버지 잘못 만나서 고생이군."
"저러다 저 아이까지 무슨 화를 입는 거 아닌가 몰라."
그 중 하나는 걸음을 멈추고 준하를 잠시 바라보기도 했다. 동정의 눈빛이었으나, 그뿐이었다. 손을 내밀어주는 이는 없었다.
준하는 그 시선들을 견뎌냈다.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이 말랐다. 뱃속은 진작부터 텅 비어 소리를 냈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한 번은 어린 시녀 하나가 지나가다 그를 딱하게 여겼는지 물 한 그릇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준하는 그것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시녀는 문지기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총총히 사라졌다.
그것이 그날 그가 받은 유일한 호의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할 무렵, 준하는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졌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지켰다.
'여기서 물러나면, 아버지의 죽음은 그대로 묻힌다.'
그 생각 하나가 다리에 다시 힘을 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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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가 저물 무렵, 낮은 신분의 서기관 하나가 나와 서류 한 장을 건넸다.
그의 걸음걸이는 빨랐고, 표정은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건은 접수되었으나, 조사에 진척이 없어 잠정 보류 처리되었습니다."
"보류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준하가 서류를 붙잡았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단서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더 궁금하시면 다음 달쯤 다시 오시지요."
"단서가 부족하다니, 조사는 제대로 했습니까. 현장에는 가보셨습니까."
준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하루 종일 쌓인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 했다.
서기관은 그런 준하를 잠시 쳐다보더니, 사무적인 어조로 답했다.
"저희도 처리해야 할 사건이 산더미입니다. 서무천이라는 분의 사건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분은 제 아버지십니다."
"압니다. 그러니 서류라도 받아 가시라는 겁니다."
서기관은 그 말만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걸음이었다.
준하는 손에 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종이 한 장에 담긴 무성의함이 그를 짓눌렀다.
글자 몇 줄, 관인 하나,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무림맹이 내놓은 전부였다.
'이곳은 정의를 지키는 곳이 아니다. 그저 세력과 이름값으로 움직이는 곳일 뿐이다.'
그는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것이 무림맹이 그에게 내어준 전부였다.
하루 종일 서 있었던 다리, 참아야 했던 조롱, 그 모든 것의 대가가 종이 한 장이었다.
돌아서는 준하의 등 뒤로, 문지기들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낮에 들었던 그 실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웃음이었다. 마치 이 하루가,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순간, 준하는 결심했다.
무림맹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스스로 진범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스승의 명성이 거짓이든 아니든,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이 묻히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는 아직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총단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것을 뒤로하고, 준하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