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가을이 깊어지면 왕도의 귀족들은 저마다 방벽 마법사를 자랑거리로 내세우기 바빴는데, 그것은 곧 그 가문의 격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훈장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벽 마법은 백 년에 한둘 나올까 말까 한 희귀한 재능으로, 그 능력을 지닌 이는 왕실의 부름을 받아 국경의 결계를 잇는 임무를 맡을 수도 있었으며, 그런 딸을 둔 가문은 사교계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었다. 무도회 초청장 하나에도 방벽 마법사를 둔 가문의 이름이 먼저 적히는 것이 관례였고, 그 이름이 적히지 않은 초청장은 받는 이 스스로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조명환 자작가에도 그런 딸이 있었으니, 열여덟 강여진이었다. 여진의 방벽은 왕도의 마법사 협회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견고하다는 평이었고, 그 능력이 알려진 뒤로 자작가의 응접실에는 청혼서가 눈처럼 쌓였다는 것이 사교계의 공인된 소문이었다. 어느 부인은 여진을 두고 "하늘이 조명환가에 내린 선물"이라 불렀는데, 그 표현이 과장이라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여진의 동생, 열여섯 강소이가 있었다. 소이는 마법을 전혀 쓰지 못했는데, 이 세계에서 마법이란 숨을 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이었으므로, 마법 무능력자란 곧 존재 자체가 결함처럼 취급받는 낙인이었다. 소이는 자작가의 딸이면서도 부엌에서 나고 자란 하녀처럼 살았고, 새벽마다 불을 지피고 저녁마다 그릇을 씻었으며, 손등은 기름과 물에 갈라져 언제나 붉었다. 어머니 한미연은 소이를 볼 때마다 마치 실수로 태어난 존재를 보듯 눈을 가늘게 떴고, 그 시선을 받을 때마다 소이는 숨을 죽이는 법을 익혔다. 어쩌다 마주치는 자리에서도 한미연은 소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저것"이라 지칭했는데, 그 호칭에 이미 익숙해진 자신이 우습다고 소이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다행이라면, 소이의 몸에는 전생 한국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저택 안에 소이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도 소이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내일 아침 상에 올릴 육수를 우려내고 있었다. 뭉근히 끓는 냄비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으며, 소이는 손끝으로 국물의 온도를 가늠했다. 육수는 마지막 한 시간이 가장 중요했다. 불을 너무 세게 하면 뿌옇게 흐려지고, 너무 약하면 맛이 얕아진다는 것을 소이는 전생의 감각으로 알고 있었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그 작은 식당, 그리고 마감 후 홀로 앉아 내일 메뉴를 고민하던 밤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때는 국물 한 그릇에 손님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보는 게 유일한 보상이었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소이의 손끝에서 나온 음식이 얼마나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도 소이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집에서 자신의 존재는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모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슬퍼하는 데도 이미 지쳐 있었다. 국물이 끓어오르는 소리만이 부엌을 채우고 있었고, 소이는 나무 국자를 든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날 밤, 소이는 낯선 인기척을 느꼈다. 처음엔 바람 소리인가 했으나, 곧 그것이 사람의 발소리라는 걸 알아챘다. 여진의 방 쪽 창문이 열려 있었고,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며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림자를 언뜻 비추었던 것이다. 소이는 냄비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창가로 다가갔는데, 정원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 낯익은 형체 둘이 서 있었다. 하나는 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준서였다. 남작가의 차남이라는 그 남자는 자유롭고 반항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으며, 보수적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여진은 그런 준서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놓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이는 그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늘 그랬듯 창문을 조용히 닫고 못 본 척했다. 이 집에서 여진의 일을 발설한다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일지, 소이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마 매질일 것이고, 혹은 그보다 더 조용하고 긴 형태의 벌일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여진의 어깨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메어 있었고, 정원 담장 너머에는 준서가 준비해 둔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이건 밀회가 아니라 도주였다. 여진은 마지막으로 저택을 돌아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슬픔이나 미안함보다는 해방감이 짙게 어려 있었다. 오랫동안 방벽이라는 이름의 속박 안에서, 왕실의 기대와 부모의 찬양 속에서 스스로를 지워 온 여진에게, 이 도주는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선택한 삶이었을 것이다. 소이는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도 부러움이 스쳤다. 나는 이 집에서 도망칠 자유조차 없는데, 언니는 그 자유마저 스스로 만들어내는구나. 그 생각이 들자 목 안쪽이 뜨거워졌는데, 그것이 부러움인지 서러움인지 소이 자신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마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은 완전한 정적으로 돌아갔다. 창밖에는 안개가 낮게 깔려 정원의 나무들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었고, 그 안개 속으로 마차 바퀴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소이는 창가에 서 있었다. 소이는 다시 아궁이 앞에 앉아 육수를 저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아니면 뭔가 거대한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예감인지 소이는 알 수 없었다. 국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나 놓칠 뻔했다.
다음 날 아침, 여진의 방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시녀 박다혜였다. 다혜는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며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셔야 합니다"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고, 결국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는 정돈된 채였고 화장대의 물건들도 그대로였으나, 옷장 한 칸이 텅 빈 것을 다혜는 곧 알아챘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저택 전체로 퍼졌는데, 한미연이 비명을 지르며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가 부엌까지 들려왔다. "여진아! 여진아 어디 있니!" 하는 그 목소리는 평소의 위엄과는 전혀 다른, 짐승이 우는 듯한 소리였다. 소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냄비 뚜껑을 조용히 덮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소이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기도 전에, 저택의 대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갑옷을 갖춰 입은 자작가의 사병들과, 그보다 더 위압적인 문양을 새긴 왕실 조사관들의 마차가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 뒤이어 무거운 군화들이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부엌 창문까지 진동을 실어 왔고, 소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손에 쥔 국자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방벽 마법사의 실종이란 개인의 일이 아니라 왕실의 일이었으니, 이 소란은 결코 하루 만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소이는 문득 자신이 이 폭풍의 한복판에서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 안에서 밤마다 여진의 창가를 지나쳐야 했던 사람, 부엌에서 모든 소리를 가장 먼저 듣는 사람. 다름 아닌 소이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