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명희가 차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잠깐 내 얼굴을 스쳤다.
"어제 있었던 일, 저도 들었어요."
"그래."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
짧게 대답했다. 명희는 놀란 눈치였다.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했겠지.'
그런데 오늘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그럼 좀 쉬셔야…"
"쉴 시간이 없어."
명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 사이 나는 장부를 한 장 더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래도, 밤새 한숨도 안 자셨잖아요…"
"자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뭔데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목구멍이 화끈했지만, 그 열기가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세하령 장부 정리."
명희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만한 말 중 가장 이상한 말을 골라낸 사람을 보는 표정이었다.
"아가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후계자 자리가 넘어갔는데, 장부 정리라니요!"
"중요해."
"어떻게요?!"
명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평소 조용한 성격의 명희답지 않았다. 명희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 명희를 잠시 바라봤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나를 위해 감정을 낸다는 게, 새삼 고마웠다.
'다들 걱정할 시간에 계산기를 두드리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이걸 정리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아무도 이 영지가 어떻게 운영됐는지 모르게 돼."
"그건 이제 서인 아가씨나 후작님이 알아서 하실 일 아니에요?"
"알아서 못 해. 두 분 다 이 장부를 읽을 줄 몰라."
명희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그럼 지금까지 세하령이 어떻게 굴러간 거예요?"
"내가 굴렸으니까."
명희는 그 대답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이걸 왜 정리하시는 거예요?"
나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사실 나도 완전히 정리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붓끝으로 종이 위에 의미 없는 선을 하나 그었다가 지웠다.
"모르겠어. 그냥, 내가 한 일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싫어."
명희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의자가 살짝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응."
"저는 아가씨가 하신 일, 다 알아요. 세하령 사람들도 다 알고요."
"…"
"흉작이 든 해에 곳간을 열어주신 것도, 수로 막힌 거 밤새 고민해서 새로 낸 것도, 다 저희가 봤어요. 그때 아가씨 손에 흙 묻은 거, 제가 씻겨드렸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마당의 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에 아이들 옷 만들어주라고 옷감 내주신 것도, 다들 기억해요. 그 옷 아직도 입는 애들 있어요."
"그러니까 아가씨, 이 저택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해서 아가씨가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명희의 말은 서툴렀지만, 그 서투름이 이상하게 진심으로 들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상하네. 이런 말에 흔들릴 줄은 몰랐는데.'
눈을 뜨자 명희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희."
"네?"
"만약에, 내가 이 집을 나가게 되면."
명희가 숨을 죽였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르겠어. 아직 정해진 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그냥, 만약이라고."
명희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저도 데려가주세요."
예상 못 한 말이었다. 나는 명희를 봤다.
"왜."
"아가씨 없는 이 집, 저는 있을 이유가 없어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는 짧지 않았다.
나는 잠시 명희의 눈을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진심이구나.'
나는 명희의 손을 잡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명희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졌다.
"고마워."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명희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이 며칠 만에 처음으로 마음을 조금 놓게 만들었다.
그날 오후, 저택에는 왕실에서 보낸 초청장이 도착했다. 붉은 봉인이 선명한 그 초청장을 집사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들어왔다.
사흘 뒤 열리는 궁중 연회에 강씨 후작가 전원이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그 초청장을 받고 표정이 굳었다. 봉인을 뜯는 손가락이 유난히 느렸다.
어머니는 오히려 반가운 기색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목소리가 한 단계 밝아졌다.
"이현 왕자님 쪽에서 사과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게 아닐까요."
나는 그 초청장을 곁눈질로 보며 생각했다.
'사과의 자리라니. 너무 낙관적인 해석이다.'
애초에 왕실 연회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열릴 리가 없었다.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면 될 일이지, 후작가 전원을 부를 필요는 없었다.
'전원이라는 게 걸린다.'
보통 이런 식의 초청은 뭔가를 확인하거나, 뭔가를 발표하기 위한 자리였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아버지는 여전히 초청장을 손에 쥔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어머니의 기대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 침묵의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사흘 뒤. 그날이 오면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