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약자님, 언니가 더 좋으세요?

1화

장부를 넘기던 손이 멈춘 건, 창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바퀴 소리가 유독 다급했다.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평소보다 두 배는 빨랐고, 말발굽 소리도 세 마리 이상이었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씨 후작가의 영지, 세하령. 나는 이곳에서 열여섯 해 중 열 해를 보냈다. 아버지 강태호 후작은 장녀 서인을 왕궁으로 보내고, 나를 영지로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문을 이을 사람은 필요하고, 왕실과 인연을 맺을 사람도 필요하다.' 그렇게 나뉘었다. 언니는 왕자의 혼약자로, 나는 영지 관리인의 딸로. 다들 내가 손해 보는 역할이라 여겼지만 나는 아니었다. 숫자와 사람을 다루는 일은 내게 잘 맞았고, 십 년 동안 세하령의 세수는 꾸준히 늘었다. 올해는 재작년보다 12퍼센트 더 걷혔다. 밀 수확이 좋았던 해도 아니었는데 12퍼센트라니, 나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조금 뿌듯했다. 그 마차가 후작가에서 보낸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장부를 덮었다. '급한 용무가 아니면 사람을 이렇게 서둘러 보내지 않지.' 세하령에서 본가까지는 마차로 반나절 거리였다. 그 거리를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 안에 왕복하려면 말을 세 번은 갈아타야 했다. 그만큼 서둘렀다는 뜻이었다. 집사 박씨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이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가씨, 후작님께서 즉시 본가로 오라십니다." "이유는?" "그것까지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전언을 가져온 사람이 몇이지?" "셋입니다." 나는 짐을 챙기라 이르고 창밖을 봤다. 마차를 끌고 온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었다. 평소 같으면 하나로 충분한 일이었다. 서류 하나 전달하는 데 셋씩이나 보낼 이유는 없었다. '셋이나 보냈다는 건, 급하다는 뜻이거나 중요하다는 뜻이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나쁜 예감이 논리보다 앞서는 걸 싫어했지만, 이번엔 예감이 먼저 도착했다. 배 속이 묘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옷 몇 벌과 도장, 최근 세수 기록이 담긴 장부 한 권. 나는 그 장부를 마지막에 챙겨 넣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십 년 동안 만들어온 숫자들은 증거로 남겨야 했다. 본가로 가는 길, 마차 안에서 나는 최근 왕궁에서 들려온 소문들을 하나씩 짚어봤다. 서인 언니가 이현 왕자와 파혼했다는 이야기. 그날 저녁 무도회에서 왕자가 다른 여인과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 소문은 대개 부풀려지지만, 이번엔 유독 여러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나왔다. 세하령의 상인들조차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왕궁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일일 것이었다. '만약 파혼이 사실이라면, 서인 언니의 자리가 흔들린다.' 그리고 언니의 자리가 흔들리면,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밀밭을 봤다. 올해도 풍년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밀밭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지금 밀 걱정을 할 때는 아니지.' 그래도 눈은 자동으로 밭을 훑고 있었다. 십 년의 습관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후작가에 도착했을 때, 저택 앞에는 이미 다른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하나는 낯익은 문양이었다. 이준혁의 가문 것이었다. 내 혼약자. 어릴 적부터 정해진 사이였고, 서로 얼굴을 아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감정도 없는 관계였다. 또 하나는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그 문양을 눈에 담았다. 은색 바탕에 청색 검. 어느 가문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왕궁 문양도 아니었고, 내가 알고 있는 유력 가문의 문양도 아니었다. 새로 세력을 얻은 가문일까, 아니면 지방의 소가문일까. 짧은 순간 여러 가능성이 머릿속을 지나갔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는 문양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집안 잔치도 아니고, 가문 회의도 아닌데 낯선 손님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마음 한구석에 적어두었다. 응접실 문을 열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인 언니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언니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했고, 눈가는 붉었다. '울었구나.' 서인 언니가 우는 일은 드물었다. 경국지색이라 불리는 언니는 자존심이 강해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어릴 적 넘어져 무릎이 찢어졌을 때도 이를 악물고 참던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왔구나. 앉아라."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다. 나는 그 자리에 놓인 빈 의자에 앉으며 방 안을 한번 훑어봤다. 촛대가 세 개나 켜져 있었다. 저녁도 아닌데. 다들 오래 이야기를 나눌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답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서인이의 혼약이 파기되었다."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실제로 듣는 것과는 달랐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왕자님 쪽에서 먼저 파기를 통보했다는 겁니까." "그래."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수치가 섞여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보였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보고 있었다. 마치 이 방 안의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한 자세였지만, 그럴 리 없었다. 나는 서인 언니를 쳐다봤다. 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을 꽉 쥐고 있었다. 손수건 끝이 이미 축축했다. '파혼당한 것도 충격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급하게 셋이나 마차를 보내진 않는다.' 파혼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후작가 정도의 권세면 시간을 두고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말을 세 마리씩 갈아타며 나를 부를 이유는 없었다. 뭔가 더 있었다. "그것뿐입니까." 내가 묻자,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인 언니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때 응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이준혁이었다. 내 혼약자.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 이준혁은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에 걸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 웃음이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그는 대답 없이 서인 언니를 먼저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길었다. 나는 그 순간, 이 방 안의 온도가 조금 바뀐 것을 느꼈다. 촛불이 흔들린 것도 아닌데, 방 안이 갑자기 서늘해진 느낌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준혁의 시선이 서인 언니에게 머물러 있는 그 몇 초가, 다른 어떤 설명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설마.' 나는 그 설마를, 아직 믿고 싶지 않았다. 방 안의 어른들도, 언니도, 아무도 그 시선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었구나.' 나만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응접실에 셋씩이나 마차를 보내며 나를 부른 진짜 이유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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