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언니, 오늘 정말 대단했어요."
소은이 웃으며 다가왔다.
연회장의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방금 전까지 눈물로 젖어 있던 속눈썹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라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연회장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 얼굴과, 지금 이 웃는 얼굴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면 진짜 잘 벗네.'
배우도 저렇게는 못 할 거다. 눈물 뚝뚝 흘리다가 몇 분 만에 저렇게 화사하게 웃을 수 있다니.
"무슨 뜻이니."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게, 숨을 한 번 골랐다.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저 다 알아요, 언니가 얼마나 놀랐는지."
소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마저도 사람들 눈에는 사랑스러워 보이겠지.
"사흘 뒤면 이 집에서 나가야 할 텐데, 짐은 미리 싸두시는 게 어때요?"
'이 미친.'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겉으로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하는 게 느껴졌다.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낮게 물었다.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소은의 웃음이 잠깐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녀의 진짜 얼굴을 봤다.
분홍빛 눈동자에 담긴 것은, 순수한 미움이었다. 저 눈빛을 이 저택에서 몇 번이나 봤을까. 그때마다 나는 못 본 척 넘어갔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잘못한 게 없다고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슬쩍 눈으로 확인하는 것까지, 참 철저했다.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다 가졌잖아요. 공작가의 친딸, 왕태자의 약혼녀, 모두가 우러러보는 완벽한 영애."
"저는 부모님이 사고로 죽고, 오갈 데 없어서 이 집에 들어온 거예요. 처음부터 언니의 자리를 빼앗을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요."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논리로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소은에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나를 무너뜨릴 명분이었다.
"이시우 님도, 아버지도, 처음엔 언니만 봤어요."
소은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요? 그 사람들 마음을 얻으려고, 얼마나……"
그녀는 말을 멈추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금까지 격정적으로 흔들리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평온해졌다. 저 전환 속도는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다 끝났어요. 언니."
"사흘 뒤면 언니는 이 나라를 떠나고, 저는 태자님과 결혼해서 왕비가 될 거예요."
'그럴 것 같지?'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소설의 결말을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게, 지금처럼 위안이 된 적은 없었다.
왕국은 소은의 결혼 이후로도 한참을 흔들렸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지, 소설에는 짧게 몇 줄로만 적혀 있었지만 나는 그 몇 줄 뒤에 숨은 지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근, 반란, 그리고 이시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까지. 소은이 저 웃음을 지을 자격이 있는지, 나는 의문이었다.
"소은아."
나는 조용히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소은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가 한 발짝 다가섰다. 방금까지의 여유는 사라지고, 눈동자에 경계심이 스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녀를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소은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저 년, 뭔가 눈치챘나.'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소은에게 내가 결말을 알고 있다는 걸 들키는 순간, 상황은 지금보다 백 배는 더 골치 아파질 테니까.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서재의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들어오너라."
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촛불 아래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그늘져 보였다.
"아버지."
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정말로 제가 소은을 학대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증언이 그렇게 많은데, 다 거짓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펜이 서류 위를 계속 오갔다. 마치 나와의 대화가 그 서류보다 덜 중요한 것처럼.
"저는 정말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은하야."
아버지가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나는 아무런 온기도 찾을 수 없었다. 열여섯 해를 봐 온 얼굴인데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너는 늘 완벽했다. 왕비 교육도, 예법도, 학문도, 성녀의 힘도. 그런데 그 완벽함 뒤에 뭐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완벽하게 살아온 게 죄가 된다는 소리인가.
"소은이는 감정을 숨기지 않아.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운다. 사람들이 그 애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다."
"너는 늘 표정이 없지. 뭘 느끼는지, 뭘 원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럼 내가 감정 표현을 안 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하는 거야, 지금?'
마음속에서 뭔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어릴 때부터 감정을 죽이라고 가르친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영애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완벽해야 한다고, 왕비가 될 사람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예법 선생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보였다가 종아리를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 말을 그대로 지켜온 게 지금의 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문제라고?'
나는 목걸이 안의 보석이 다시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보석이 옷 위로도 온기가 느껴질 만큼 뜨거워졌다.
"저는 그저,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판결은 사흘 뒤다. 그 전에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보아라. 하지만 내가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다. 왕실의 눈치도 봐야 하니까."
그 말이 결정타였다.
아버지는,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서재를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손끝이 떨리는 걸 억누르려 애썼다.
'울지 마. 여기서 울면 진짜 끝이야.'
복도의 촛대 하나가 바람에 흔들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나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나는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목걸이를 풀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검은 보석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랑 나만 남았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가족도, 약혼자도, 그 누구도 내 편이 아니었다.
오직 이 보석만이, 내가 지켜야 할 유일한 이유였다. 그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창밖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 정원 나무 그늘 아래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낯익은,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형체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 형체를 바라보았다.
'저게, 대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