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멸 예정 성녀 영애

3화

궁을 빠져나와 마차에 오르자마자, 나는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목에 걸린 검은 보석. 겉으로는 그저 장식품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다온 왕국을 위협하는 악마의 파편이 봉인되어 있었다. 이 보석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국왕과 아버지, 그리고 나뿐이었다. 소은도, 이시우도 모른다. 왕국 사람들은 그저 '성녀의 힘'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만 알고 있을 뿐, 내가 매일 밤 이 보석을 정화하며 왕국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왜 지금 요동치는 거야.' 보석이 뜨거워졌다. 손바닥이 데일 듯 화끈거렸다. '참아. 참아야 해.' 나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어릴 때부터 배운 정화의 기술. 마음을 비우고, 보석 안의 어둠을 향해 내 힘을 밀어넣는 감각.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다시 들이마시고. 기본 중의 기본인데도 오늘은 손끝이 자꾸 어긋났다. '그러게 침착 좀 하지 그랬어, 서은하.' 연회장에서의 그 순간이 눈앞에 자꾸 겹쳐졌다. 영애들이 손가락질하던 얼굴, 왕태자의 차가운 눈빛, 소은의 눈물. 전부 다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됐다. '생각하지 마. 지금은 이거부터.' 순간, 머릿속으로 익숙한 장면들이 밀려들었다. 전생의 나는, 고아원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이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형제도 없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소설이 『심연의 성녀』였다. 주인공은 소은. 밝고 감정 풍부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녀. 그녀가 백작가에서 자라던 시절 부모를 사고로 잃고, 공작가에 입양되어 겪는 시련과 성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왕태자와 결혼해 왕비가 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서은하가 있었다. 소은을 시기하고 질투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역. 결국 진실이 밝혀져 추방당하고, 그 후 왕국은 악마의 힘에 잠식되어 멸망 직전까지 간다. 마지막에 소은이 각성한 힘으로 겨우 왕국을 구해낸다는 결말이었다. 읽을 때는 그냥 흔한 클리셰라고 생각했다. 악역은 벌 받고, 주인공은 행복해지고. '그게 내 얘기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나는 열두 살, 갑자기 이 모든 기억이 선명해졌던 그날을 떠올렸다. 온몸이 떨리고,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미친 줄 알았다. 몇 날 며칠을 앓으면서, 이게 열병 때문에 생긴 헛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이 전부 사실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소설 속 지명, 인물들의 습관, 하다못해 시녀들의 이름까지 하나씩 맞아떨어질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축하한다, 서은하. 너는 망할 나라의 악역으로 태어났다.' 소설 속에서 서은하가 정화하던 보석에 대한 언급은 짧게 몇 줄뿐이었다. 독자들은 신경 쓰지 않았을 부분. 댓글창에서도 다들 그 부분은 그냥 넘겼다. '악역이 뭘 하든 관심 없지, 다들 소은이랑 왕태자 러브라인만 보느라.' 하지만 나는, 그 짧은 몇 줄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아가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서은하가 사라지면, 보석을 정화할 사람이 없다. 소은은 성녀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은 밖으로 나타나는 악마를 퇴치하는 힘이었다. 안에서부터 왕국을 갉아먹는 이 보석은, 오직 서은하만이 정화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나는 직접 힘을 써보며 알게 되었다. 소은의 힘과 나의 힘은 결이 달랐다. 같은 성녀의 피를 이었다고 다 같은 게 아니었다. 소은의 힘은 밝고 뻗어나가는 빛이었고, 내 힘은 어둠을 삼키고 가라앉히는 종류의 것이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게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니.'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냥 웃겼다. '그러니까, 내가 없어지면 이 나라는 진짜로 망한다는 거지.' 소설의 결말에서 소은이 각성한 힘으로 왕국을 구했다는 서술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각성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작가가 분량 조절에 실패했는지, 그냥 얼렁뚱땅 넘긴 건지. '각성 장면 딸랑 세 문장이었잖아. 그것도 대충 쓴 거.' 그리고 각성하기 전까지, 왕국은 이미 절반 이상 폐허가 된 상태였다. 수도가 불타고, 국경이 뚫리고, 백성들이 죽어 나가는 장면들이 몇 챕터에 걸쳐 나왔었다. 그 몇 챕터가, 지금 내 목숨과 직결된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보석의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팔까지 번졌다. '제발, 진정해.' 나는 이를 악물고 힘을 밀어넣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숨을 쉴 때마다 명치 아래가 뜨겁게 조여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참으면 돼.' 한참을 그렇게 씨름한 끝에, 보석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는 마차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하필 오늘, 이런 날.' 보석이 요동친 건, 아마 내 감정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일 거다. 정화하는 힘은 마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다. 분노, 절망, 배신감 같은 감정이 커질수록 보석은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오늘 하루에만 그 세 가지를 다 겪었으니, 보석이 얌전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감정 관리 진짜 잘해야 한다는 거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게 습관이 아니라 이제는 생존을 위한 필수 기술이 된 셈이었다. 전생에는 화나면 그냥 화내고, 서러우면 울면 됐는데. 지금은 그럴 때마다 손바닥이 지져지는 기분이었다. '개 같은 인생이네, 진짜.' 창밖으로 궁의 불빛이 멀어지고 있었다. 사흘 뒤, 정식 판결이 내려진다. 추방이 확정되면, 나는 이 왕국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이 보석은, 나 없이 방치된다. '그럼 소설대로 왕국이 무너지는 거고.' 나는 눈을 감았다.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증거도 없고, 증언한 영애들을 하나하나 반박할 시간도 없었다. 애초에 그 자리에서, 누구도 내 편을 들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원작대로면 나는 못돼먹은 악역이니까.'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소설의 결말을 안다. 이게 유일한 무기였다. 남들은 모르는 미래를, 나만 알고 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가 관건이었다. '추방을 피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결백을 증명하는 것에서, 살아남아 왕국을 지키는 것으로. 목표를 바꿔야 했다. 억울함을 풀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다, 살아서 이 보석을 계속 정화하는 게 훨씬 현실적인 목표였다. '감정보다 생존이 우선이지. 그게 맞는 거야.' 마차가 저택 앞에 멈췄다. 나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아직도 손바닥에 남은 열기가 얼얼했다. 그런데 저택 입구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소은이었다. 혼자서,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분홍빛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연회장에서 눈물 흘리던 그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뭐야, 저 표정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언니." 그녀가 나를 불렀다. 연회장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서늘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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