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서툰 손끝, 그대의 열

5화

"카젤이 온다고요?" 이하람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병사는 계속해서 상황을 보고했다.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국경 초소 세 곳이 이미 함락됐습니다.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빠릅니다." 서윤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이대로라면…… 사흘입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병사가 물러난 뒤에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촛불 하나가 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이하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주와는 다른 종류의 반응이었다. 두려움, 혹은 어떤 오래된 상처가 다시 건드려진 듯한 표정이었다. '카젤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였어.' '저 표정, 처음 봐.' 나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얼굴들을 떠올렸다. 아플 때도, 발작이 올 때도 웃으려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웃음기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하람님, 지금 상태로는……" 서윤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 했다. "괜찮아요." 이하람이 그 말을 잘랐다. "싸울 수 있어요."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걸 느꼈다. '저 사람이 저 상태로 다시 싸운다고?' '저주가 심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죽는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붙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컵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서윤재가 나를 돌아보았다. "성녀님." "네." "사흘 안에 하람님의 상태를 최대한 안정시켜야 합니다. 완전한 치유가 아니더라도, 발작의 빈도라도 낮출 수 있다면 전투에 나설 여지가 생깁니다."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지금으로서는…… 어제처럼 하람님 곁에 계셔주시는 것 외엔 확실한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다시 이하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옆얼굴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저 사람, 무서운데도 안 그런 척하고 있네.' '저렇게 견디는 게 익숙해 보이는 게 더 마음 아픈데.' 문득 그가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걸 짐처럼 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젤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하람의 몸에서 저주의 붉은 자국이 옅게 다시 번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저 자국이 감정에도 반응하는 건가.' '몸 상태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지는 저주라면……' 그 순간 나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능력도 없고,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적어도 곁에 있어줄 수는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도 이상하게 발이 무거웠다. "이하람 씨." 내 목소리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 밑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원래도 창백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한층 더 색이 빠진 듯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하지만, 사흘 동안 옆에 있을게요.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요." 그의 눈이 잠시 커졌다. 그러다 천천히 다시 부드러워졌다. "……고마워요, 서아 씨." 이름을 그렇게 부른 건 처음이었다.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그냥 이름 부른 것뿐인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서윤재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걸 눈치챘다. 그 눈빛에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성녀님." "네?" "방금 하람님의 발진이 또 옅어졌습니다." 나는 놀라서 이하람의 팔을 살폈다. 정말이었다. 붉은 자국이 눈에 띄게 흐려져 있었다. 방금까지 손목을 타고 번져 있던 자국이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이었다. '또야. 어제도 이랬잖아.' '내가 옆에 있으면 나아지는 거……' 이하람도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약간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거…… 또 이러네요."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안도와 함께 미묘한 불안이 섞여 있었다. 서윤재의 얼굴에 처음으로 옅은 긴장이 스쳤다. 평소 침착하기만 하던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드문 일이었다. "성녀님의 힘이 반응하는 조건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험한 방향이요?" 서윤재는 대답 대신 창밖, 국경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검붉은 기운이 지평선 위로 번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 한쪽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것처럼, 붉은빛이 구름 사이를 타고 스며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저게…… 카젤이 오고 있다는 신호인가.' 이하람의 시선도 어느새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굳어 있었다. "저 색깔……"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기억나요. 예전에도 저랬어요." "예전에도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무언가를 삼키듯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뭔가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숨어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 사연이, 사흘 뒤 이곳을 덮칠 그 존재와 깊게 얽혀 있다는 것도. 서윤재가 낮게 말했다.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확신 없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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