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하람이 옮겨진 곳은 성의 서쪽 별관에 있는 방이었다.
하얀 커튼이 걸린 창, 낮은 침대, 벽마다 놓인 촛대. 방 안엔 은은한 약초 냄새가 배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오는 동안에도 그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마른 풀을 태운 것 같은 향이었다.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냄새였다.
서윤재는 나를 그 방으로 안내하며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차분했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 흔들리지 않는 어조. 하지만 그 침착함 뒤에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 세계는 마법과 신앙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신관들은 치유 마법을 다룰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마법으로는 저주를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저주는 오직 성녀의 힘으로만 풀릴 수 있다는 것이 이 세계의 오랜 전언이었다.
"저주라는 게, 그냥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되는 거예요?"
"안됩니다. 신관들의 치유력은 육체의 상처나 병을 다스리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저주는 다른 영역입니다."
"다른 영역이요?"
"저주는 신의 권능과 얽힌 문제라서요. 그래서 성녀님의 힘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저는 힘이 없잖아요."
"압니다."
서윤재는 또 그렇게 대답했다.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안에 어떤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성녀님의 힘이 지금 당장 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말을 끊었다.
"다만 뭐요?"
"지금으로선 발현될 조건을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붉은 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와 방 안을 물들였다.
"역대 성녀들의 기록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럼 그동안 하람이는요."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도 몰랐던 떨림이었다.
서윤재는 그런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이하람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호흡은 조금 안정된 것 같았다. 발진은 팔뚝에서 목까지 번져 있었다.
붉은 자국들이 마치 넝쿨처럼 얽혀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색이 더 짙어진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조금 내린 것 같았다.
'뭘 해야 하지.'
'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성녀라는 이름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옷 같았다. 입고 있어도 자꾸 벗겨지는, 맞지 않는 옷.
그러던 어느 날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동생이 어렸을 때, 고열로 밤새 앓았던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늦게 오시는 날이라 내가 혼자 동생을 지켜야 했다. 그때 나는 물수건을 계속 갈아주고, 동생의 손을 놓지 않고 밤을 새웠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지만,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동생은 아침이 되자 열이 내렸다.
그때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무섭고, 아무것도 몰라서 자꾸 눈물이 났지만 동생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의 감각이 지금과 이상하게 겹쳐졌다.
'그때처럼 하면 되는 걸까.'
'힘도 없고, 마법도 모르고, 그런데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 말고 내가 뭘 할 수 있지.'
생각해보면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특별한 능력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옆에서 버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서윤재에게 물수건과 대야를 부탁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이하람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아까까지 그렇게 뜨거웠던 몸이 지금은 오한에 떨리고 있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온기를 나눠주려는 것처럼.
"괜찮아요."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말했다.
"내가 옆에 있을게요."
방 안은 조용했다.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 창밖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하람의 손가락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나는 놀라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고맙……"
작은 목소리였다. 잠결에 하는 말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뭐야,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하지.'
'그냥 잠꼬대일 텐데.'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지.'
손등으로 눈가를 슬쩍 문질렀다. 울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하람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봤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고통스러운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손끝에 닿는 살갗이 뜨거우면서도 축축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그때 서윤재가 물수건과 대야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방문 앞에 서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녀님."
"네?"
목소리에 긴장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방금 그 순간, 하람님의 발진이 아주 잠깐 옅어졌습니다."
나는 놀라서 이하람의 팔을 다시 살폈다. 발진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서윤재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확실해요? 지금 보니까 색이 그대로인데……"
"압니다. 지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들어오기 직전, 분명히 옅어졌습니다."
그는 대야를 협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성녀님의 무언가가 반응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그냥 평범한 손이었다. 그런데 저 손이 방금 이하람의 저주에 무언가 영향을 줬다는 건가.
'내가 한 거야? 진짜로?'
'뭘 했다고, 나는 그냥 손을 잡고 있었을 뿐인데.'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인지 기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서윤재가 내 옆에 다가와 이하람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손끝이 발진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방금 성녀님이 뭘 하고 계셨습니까."
"그냥…… 손을 잡고 있었어요. 그리고 말을 걸었고."
"어떤 말을요."
"괜찮다고. 옆에 있겠다고."
서윤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그, 그게 뭐 중요해요? 그냥 흔한 말이잖아요."
"흔한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성녀님의 힘은 어쩌면, 마법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발현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달라진 것 같았다. 촛불 하나가 유난히 크게 흔들렸다.
나는 다시 이하람을 내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아까보다 표정이 조금 편해진 것 같기도 했다.
'설마, 진짜 나 때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윤재의 눈빛은,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 더 지켜보겠습니다."
서윤재가 물수건을 대야에 담갔다가 짜서 내게 건넸다.
"성녀님이 계속 곁에 있어 주시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젖은 수건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이하람의 손을 다시 잡았다. 아까보다 조금은 덜 차가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목에서 시작된 발진 하나가 다시, 아주 짧게, 옅어졌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