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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유마리가 다녀간 다음 날부터, 저택의 공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복도를 지나는 시녀들의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워진 것 같았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평소보다 말이 줄어들었는데, 그 침묵이 세아에게는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왕실에서 정식으로 사람을 보내 세아의 마력 측정 결과를 재확인하겠다는 통지가 왔고, 서재에서는 밤늦게까지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선우도현과 한서은이 나누는 대화의 온도가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세아는 문틈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던 낮은 목소리들, 종이 넘기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끊기던 정적. 세아는 잠옷 차림으로 복도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그 소리들을 엿듣다가, 문득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다섯 살짜리가 첩보 활동을 하고 있네.' 하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게 문제였다. 저 안에서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세아가 직접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유마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재능이라면 마법사단에 조기 편입시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게 좋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마법사단이라는 단어가 게임 속에서 세아를 '왕실에 종속된 도구'로 만들던 장치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화면 너머로 지켜보던 그 캐릭터, 마법사단 소속 완장을 차고 왕명이라면 무엇이든 수행하던 그 인형 같은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 끌려가면 안 돼.' 선우도현은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켰는데, 그 표정에서 딸을 위험 요소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판단과, 왕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고민이 팽팽하게 부딪히고 있는 듯했다. 그의 손가락이 팔뚝을 두어 번 두드리는 게 세아의 눈에 들어왔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사람의 버릇 같았다. 한서은은 딸을 감싸안듯 옆에 붙어 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조기 편입이라니, 아직 다섯 살인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반대의 뜻이 담겨 있었지만, 유마리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한 거예요. 이렇게 강한 마력을 방치하면 언제 또 사고가 날지 모르니까요." 그 말에 한서은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세아를 안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는데,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화 때문인지는 세아로서도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다만 그 온기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서, 세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옷자락을 슬쩍 붙잡았다. 세아는 이 대화가 흘러가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작정 거부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린아이의 거부는 그저 투정으로 치부되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왕실 쪽에서 더 강하게 밀고 들어올 여지를 줄 뿐이었다. '협상을 해야 해.' 소윤이었을 때 배웠던 것 중 유일하게 유용한 게 있다면,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법이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결국 이런 순간을 위한 훈련이었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세아는 그 웃음을 삼키고 대신 최대한 순진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섯 살짜리 얼굴에 어울리는 표정을 짓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다. 세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마법사단에 매일 가는 대신, 가끔 배우러 가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어른들의 시선이 일제히 세아에게 쏠렸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멈춘 듯했고, 세아는 그 시선들 속에서 등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꼈다. 너무 나섰나. 아니면 딱 적당했나. 판단이 서지 않아서 손끝이 저절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유마리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몸을 낮춰 세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인공적인 향이었다. "어머,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왕립 학당에 가보고 싶어요. 거기서도 마법을 가르쳐준다고 들었어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다행히 그것이 긴장이 아니라 부끄러움처럼 들렸는지 유마리의 표정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것은 완전히 지어낸 말은 아니었는데, 게임 설정상 왕립 학당 특별반에는 강나은이 다니고 있었고, 그곳을 통해 접점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아가 애초에 그려두었던 계획의 첫걸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임 화면 속에서 나은은 늘 학당 정원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으로 등장했었다.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세아 자신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나은이를 만나려면 이 방법뿐이야.' 선우도현은 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학당이라면 안전한 인원 관리가 이루어지는 곳이니 마법사단에 매일 출근하는 것보다는 위험이 덜하다는 계산이 서는 듯했다. 그가 눈썹을 살짝 좁히며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짧은 순간, 세아는 숨을 죽이고 그 판단을 기다렸다. "학당 견학이라면... 나쁘지 않은 제안 같소." 그가 유마리를 향해 짧게 말을 건넸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딸을 위한 배려가 섞여 있다는 걸 세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의 말은 늘 짧고 건조했지만, 그 짧음 속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는 걸 세아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유마리는 잠시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흠, 완전히 편입시키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특별반 견학 정도라면 제가 다리를 놓아드릴 수 있겠네요."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세아를 조금 더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기색이 남아 있었는데, 마치 귀여운 여동생을 얻은 듯한 표정이어서 세아는 살짝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미소 뒤에 얼마나 많은 계산이 숨어 있을지, 세아는 애써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한서은은 안도한 듯 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는데, 그 손길이 처음으로 느껴본 온기 같아서 세아는 순간 울컥해지는 것을 참았다. 어머니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옅은 온도, 옷깃에서 풍기는 은은한 나무 향 같은 냄새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그럼 우선 견학부터 해보자꾸나." 어머니의 그 말이 마치 작은 선물처럼 느껴져서, 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속으로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면 또 무슨 오해를 살지 몰라서 최대한 얌전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협상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세아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마음이 완전히 놓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낮의 대화를 몇 번이나 되짚어보았다. 왕립 학당 견학이라는 작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실이 자신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고, 언제든 다시 마법사단 편입 이야기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위험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유마리라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오늘 그녀의 눈빛에서 이미 충분히 읽어낸 뒤였다. 오늘의 견학이라는 타협은 어쩌면 다음 방문을 위한 미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세아는 이불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도... 나은이를 만날 수 있어.' 그 생각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마력 폭주를 겪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게임 속 화면으로만 보아왔던 그 얼굴을 실제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다섯 살짜리 몸으로 느끼기엔 너무 과분한 흥분처럼 여겨졌다. '이게 정상인가.'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지만, 그 흥분을 억누를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창밖의 달빛이 얇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방 안을 은은하게 물들였는데, 그 빛을 바라보며 세아는 처음으로 이 낯선 삶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창틀에 어른거리는 은빛 그림자를 좇던 눈길이, 어느새 그 너머의 어둠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의 이면에는, 왕립 학당이라는 공간이 게임 속에서 히로인과 악역이 처음으로 얽히기 시작하는 무대였다는 사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 만남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는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세아는 게임 속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려 했지만 기억은 자꾸만 흩어지고 뒤섞였다. 강나은과의 첫 만남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그리고 그 만남이 자신을 어느 쪽 결말로 이끌게 될지, 세아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오직 하나, 그 학당 정원 어딘가에 나은이 있을 거라는 것뿐이었다. 견학 날짜가 정해졌다는 통지가 도착한 그날 밤, 세아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한 채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아직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한 소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더 크게 가슴을 두드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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