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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며칠 뒤, 세아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이유로 처음으로 부모의 서재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의사가 열이 완전히 떨어졌다고 확인해준 것이 이틀 전이었는데, 그 뒤로도 유모는 세아를 침대에서 좀처럼 내려놓지 않으려 했고, 하녀들은 복도를 걸을 때마다 이불을 어깨에 덧씌워주며 혹시라도 다시 열이 오를까 노심초사했다. 그 모든 과보호 속에서 세아는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는데, 몸은 이미 멀쩡해졌고 이제 필요한 건 두 다리로 이 낯선 저택을 익히는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유모의 손을 잡고 조용히 지나쳐야 할 복도였다. 서재로 이어지는 이 회랑은 저택에서도 유독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리는 구간이라, 하녀들조차 이곳을 지날 때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걸음을 조심스럽게 놓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유모가 잠시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세탁물 목록을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잠깐 자리를 뜬 것이었는데, 세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끝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언제 이 집 구조를 익히겠어.' 그런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며 걷던 중, 서재의 문틈으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들은 순간, 세아는 걸음을 멈추고 벽에 등을 붙였다. '엿듣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낮에 봤던 그 무표정과는 전혀 다른 온도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에 등을 붙인 채로 옷자락이 바스락거리지 않도록 숨을 죽였고,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얇은 옷 위로 스며들어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세아가 열이 그렇게 났는데, 그날 당신은 국경 보고서를 붙잡고 계셨더군요." 한서은의 목소리는 나무랐다기보다는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듯한, 하지만 어딘가 서운함이 묻어 있는 어조였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앓아누웠던 그 며칠간 저 문 너머에서 어떤 대화가 있었을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급한 일이었소." 선우도현의 대답은 짧고 무뚝뚝했지만, 그 뒤로 이어진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서재 안의 벽시계 소리가 그 침묵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세아는 그 초침 소리마저 문틈을 넘어 자신의 심장 소리와 뒤섞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급한 일이 아닌 날이 있었나요." 한서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화보다는 지친 체념에 가까운 것 같아서 세아는 문틈 너머 어머니의 표정을 상상하며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눈을 감으면 낮에 마주쳤던 어머니의 단정한 얼굴이 떠올랐는데, 그 얼굴에 지금 어떤 균열이 가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선우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는데, 그 소리가 유난히 느리고 무거워서 마치 대답을 고르는 시간처럼 들렸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 하나하나가 마치 뭔가를 미루는 손짓처럼 느껴졌고, 세아는 저 남자가 서류 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부인."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에 담긴 톤이 조금 달랐던 것 같았다. 낮에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서늘한 눈빛과는 다른, 어딘가 조심스러운 결을 지닌 음성이었다. "내가 부족한 남편이라는 걸 아오." 그 말에 세아는 숨을 멈췄다. 심장이 이상하게 크게 뛰었는데, 그 무표정한 남자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재 안의 정적이 문틈을 넘어 복도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는데, 그 침묵 속에서 한서은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눈을 내리깔고 있을지도, 어쩌면 창밖을 보며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세아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온갖 가능성을 그려보았다. 한서은은 짧게 웃음소리를 냈는데, 그것이 비웃음인지 자조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소리였다. "부족한 게 아니라, 곁에 없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아프게 들렸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그러면서도 결코 무너지지는 않겠다는 다짐이 배어 있는 어조였다. "세아가 자라는 걸 지켜볼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어요. 당신도 나도." 그 말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었다. 세아는 그 문장 안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 순간 유리처럼 얇아졌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선우도현은 그 말에 다시 침묵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작은 소리 하나가 어쩐지 무언가를 내려놓는 결심처럼 들리기도 했다. 종이가 책상 위에 얹히는 소리는 가벼웠지만, 세아의 귀에는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처럼 울렸다. "...노력하겠소." 짧은 그 한마디가, 세아에게는 이상하게도 진심처럼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변명도, 짜증도 섞여 있지 않았고, 그저 서투르게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손끝의 떨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서은의 대답은 냉랭했다. "그 말, 벌써 몇 번째인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원망보다는 지쳐버린 무력감이 배어 있었는데, 그 어조를 듣는 순간 세아는 문틈 너머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 어긋나 있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을 그 말과, 몇 번이나 배신당했을 그 기대가 문장 하나에 고스란히 눌어붙어 있는 것 같았다. '게임에서는 이 부분이 대사 한 줄로 처리됐었는데.' 게임 속 설정집에는 '공작 부부는 정략혼이었으나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는 문장이 짧게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그 한 줄을 읽었을 때는 그저 배경 설정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 그 안에 이런 온도와 무게가 담겨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문틈으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그 짧은 문장으로는 담을 수 없는 오래된 상처와 억눌린 마음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정략혼이라는 두 글자 뒤에 숨겨진 것이 이렇게 많은 밤과 서류와 침묵이었다는 걸, 세아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세아는 조용히 벽에서 등을 떼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고, 발바닥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 냉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냉기가 서재 안에 흐르던 냉기와 겹쳐지는 것 같았다. 이 집이 무너지지 않게, 이 냉기를 걷어낼 방법이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근거 없는 것이었지만, 어린 세아의 마음속에서 이상하게도 확신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동시에, 그 예감 뒤에는 또 다른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만약 이 부부 사이의 균열이 이대로 깊어진다면, 게임 속 세아가 그렇게 애정을 갈구하며 뒤틀려갔던 것처럼, 자신도 그 길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게임 속 세아는 그 사랑을 갈구하다 못해 결국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갔었다. 그 얼굴 없는 캐릭터의 궤적이 지금 자신의 앞에 놓인 길과 무섭도록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세아는 뒤를 돌아보며 서재의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문 너머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아까까지 흐르던 말소리보다도, 그 뒤에 내려앉은 침묵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저 안에서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 물음에 답을 얻을 방법은 없었다. 세아는 결국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는데,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방금 들었던 대화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되풀이되어 떠올랐다. 그날 밤, 세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기 시작한 듯 창틀 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는데, 세아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면서도 그 냉기보다는 마음속에서 맴도는 생각들이 더 신경 쓰였다. 부모를 화해시키는 일과 자신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 처음에는 같은 방향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곧 그 둘이 완전히 같은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왕비가 되어야 파멸을 피할 수 있다면, 그 자리를 위해 부모의 애정을 이용하는 것과, 진짜로 이 가족을 사랑해서 화해시키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하나는 생존을 위한 계산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저 순수한 바람이었는데, 그 둘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아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두 마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어린 세아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창밖의 눈송이가 하나씩 쌓여가는 것을 바라보며, 세아는 이 저택의 냉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두꺼워졌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정말로 걷어낼 수 있을지, 좀처럼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뒤척이다가야 겨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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