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로부터 며칠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세아는 무심코 튀어나온 말 한마디로 온 식탁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그날 저녁의 식당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은촛대 위의 촛불이 낮게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하녀들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접시를 나르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선우도현은 식사 중에도 손에서 서류를 완전히 내려놓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국경 지역의 곡물 배급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곁눈질로 훑으며 짧게 언급하던 참이었다.
"북부의 배급이 늦어지고 있다는군."
그 한마디에 한서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대답하려던 찰나, 세아는 접시 위의 수프를 뜨다 말고 불쑥 입을 열었다.
"곡물 창고를 나눠서 관리하면 도둑맞을 위험도 줄고, 상한 걸 빨리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숟가락이 접시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릴 만큼, 식탁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선우도현은 숟가락을 든 채로 딸을 빤히 바라보았고, 한서은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세아를 응시했는데, 다섯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 망했다.'
세아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전생의 습관이, 그러니까 회사에서 물류 관리를 담당했던 기억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거였는데, 이 세계의 다섯 살짜리 몸으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고, 세아는 애꿎은 수프 그릇만 내려다보며 숨을 죽였다.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니."
선우도현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무뚝뚝함 대신 조심스러운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그 낮은 음성이 식탁 위를 무겁게 눌렀고, 세아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눈빛이 무서워.'
세아는 얼른 얼버무렸다.
"그냥... 미래가 시장 이야기해줬어요."
손미래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는데, 자신은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에 쥔 접시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접시 위의 빵 조각이 굴러떨어졌고, 손미래는 황급히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 올리는 척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서은은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짧게 웃음을 지었는데, 그 웃음이 처음으로 진짜처럼 느껴졌던 것 같았다. 눈매가 살짝 휘어지며 평소의 딱딱한 표정이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세아는 그 낯선 얼굴에 오히려 더 당황했다.
"영특하구나."
그 말에 세아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 정도의 실언은 그냥 '똑똑한 아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얕은 기대가 스쳤는데, 곧이어 벌어진 사건은 그 안도를 순식간에 뒤엎어버렸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세아는 물컵을 들다가 손끝이 미끄러지는 걸 느꼈다. 컵의 표면에 남아 있던 물기가 손가락 사이로 배어들었던 탓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놀란 마음에 손을 뻗어 컵을 잡으려 한 것이 문제였다.
작은 손끝에서 파랗고 노란 빛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빛은 마치 두 갈래의 물결처럼 서로 엉키며 컵을 휘감았고, 유리컵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다음 순간 불길에 휩싸이는 기이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얼음과 불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지, 식탁 위의 촛불이 일제히 크게 흔들리며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요동쳤다.
"세아!"
한서은이 놀라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나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고, 그 소리에 하녀들도 놀라 벽 쪽으로 몸을 물렸다.
선우도현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아를 감싸듯이 뒤로 물러섰는데,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변한 것을 세아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전장에서 적을 마주한 사람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그 커다란 몸이 세아의 작은 몸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불길과 얼음이 뒤섞여 컵을 산산조각 내며 사그라들었을 때, 방 안에는 타는 냄새와 차가운 습기가 동시에 남았다. 유리 파편이 식탁 위로 흩어지며 촛불 빛을 받아 잠시 반짝였고, 그 위로 하얀 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게 뭐야.'
세아 자신도 놀라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과는 별개로 몸속 어딘가에서 마력이 끝없이 솟아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는데, 마치 몸 안에 거대한 수도관이 뚫려버린 것처럼 무언가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려 했다.
게임 설정에서 세아는 '전속성 마법과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지녔으나, 그 힘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폭주하곤 했다'는 문구가 있었던 걸 이제야 떠올렸다.
'하필 이 타이밍에.'
식탁을 채웠던 시선들이 일제히 세아에게 쏠렸고, 세아는 그 시선들 속에서 자신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분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갑작스레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이제는 통제되지 않는 마력까지 터뜨렸으니, 이 저택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선우도현은 딸의 손을 붙잡고 침착하게 살펴보았다. 커다란 손이 세아의 작은 손을 감싸 쥐는 순간 온기가 전해졌는데, 그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어 거칠었지만 세아를 살피는 손길만큼은 놀랍도록 조심스러웠다.
"다치지 않았소."
안심하는 듯한 그 한마디가, 무뚝뚝한 어조 속에서도 걱정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 세아는 순간 목이 메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진짜 딸처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이 저택의 안전을 위해 확인하는 걸까. 세아는 그 답을 알 수 없었지만, 손끝에 남은 온기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한서은은 급히 하녀를 시켜 왕실 마법사단에 연락을 넣으라 지시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이런 규모의 마력 발현이라면 즉시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하녀가 급히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한서은은 세아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목소리에서도 옅은 긴장이 묻어 나왔고, 세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날 밤이 늦기도 전에, 풍만한 체형에 다정한 눈매를 가진 여성이 급히 저택으로 들어섰다. 외투 자락에 아직 바깥의 찬 공기가 묻어 있었고, 서둘러 온 기색이 역력한 걸음걸이였는데, 왕실 마법사단 부대장이라는 유마리였다.
"어머, 세상에."
유마리는 세아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마력 측정용 수정구를 꺼내 세아의 손 위에 가만히 얹었다. 수정구는 매끈한 표면 아래로 은은한 빛을 담고 있었는데, 세아의 손이 닿는 순간 그 빛이 순식간에 눈부신 광채로 가득 차오르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는 유마리가 낮게 탄성을 흘렸다.
"이건... 측정 한계를 초과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손에 든 수정구가 자잘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유마리는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려는 듯 수정구를 뒤집어 보았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세아는 그 표정을 보며 자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이 이제 완전히 세상에 드러나 버렸음을 실감했다.
'감춰야 할 게 하나 더 늘었네.'
숨을 죽인 채, 세아는 어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이제 자신에게 닥칠 일이 결코 단순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선우도현과 한서은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세아의 귀에는 '왕실', '보고', '위험' 같은 단어들만 간간이 걸려들었다.
유마리가 몸을 낮춰 세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많이 놀랐지? 언니가 도와줄게."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눈매는 정말로 다정해 보였지만,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계산까지는 아직 다섯 살 아이의 눈으로는 다 읽어낼 수 없었다.
세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는데, 이 저택의 조용한 하루하루가 이제부터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그런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