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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국경 마을에 도착한 첫날, 나는 여관 주인에게 방값을 흥정하다가 그마저도 실패하고 결국 마을 어귀 헛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한때는 결계를 유지하며 대신전의 성녀라 불렸던 몸이, 이제는 짚더미 위에서 밤을 나는구나.'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낙차였지만, 그 낙차를 곱씹을 여유조차 없이 다음 날부터 발품을 팔며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걸 곱게 보지 않았고, 몇몇 주막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상단 하나가 짐꾼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는데, 상단주는 내 손바닥을 한 번 보고, 팔뚝을 한 번 보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 "손이 곱네. 일은 해봤어?" 나는 결계를 유지하느라 몇 년을 버텨온 몸이라고 자랑스레 말할 수도 없어서, 그냥 "예전에 육체노동 좀 했습니다"라고 대충 둘러댔다. '결계 유지가 육체노동은 아니지만, 정신노동도 노동은 노동이니까.' 상단주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나를 훑어보다가, 결국 하루치 품삯을 걸고 시험 삼아 써보겠다며 짐 하나를 어깨에 얹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짐꾼이 되었다. 무거운 곡물 자루와 향료 상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걷는 하루하루는 결계를 유지하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피로를 안겨주었는데, 그 피로에는 이상하게도 억울함이 섞여 있지 않았다. 결계를 유지할 때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도 그 아픔의 이유가 늘 남 때문이었는데, 지금의 아픔은 순전히 내가 선택한 결과물이라 오히려 견딜 만했다. '이게 바로 자업자득의 미학인가.' 나는 자루를 짊어질 때마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상단의 다른 짐꾼들은 나를 신기해했다. 손이 너무 희고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곧다며 수군거렸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들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저 같은 밥을 나눠 먹는 동료로 대해주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고마웠다. 상단이 국경 근처의 큰 시장 마을에 도착한 날, 나는 짐을 부리느라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시장은 온갖 사람들이 뒤섞여 소란스러웠는데, 향신료 냄새와 가축 냄새, 그리고 낯선 언어들이 뒤섞여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짐 상자를 내려놓다가 우연히 시장 한쪽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검은 머리카락, 곧은 등,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검의 손잡이. '설마 또…' 나는 그가 이 근방을 지나갈 이유가 뭘까 생각하며 다가가려다가, 그가 어떤 상인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발을 멈췄다. 대화의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상인이 그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는 모습에서 그 남자가 이 마을에서도 결코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상인은 심지어 뒷걸음질을 치듯 물러났는데, 그 태도가 마치 왕 앞에서 물러나는 신하 같아서 나는 저도 모르게 감탄과 함께 헛웃음이 나왔다. '저 정도면 그냥 지나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이 근방의 숨은 실세 아닌가.' 그가 문득 시선을 돌려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이미 숨을 곳도 없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도망칠까 잠깐 고민했지만, 짐 상자를 어깨에 걸친 채 도망치는 짐꾼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웠으므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또 만나네." 그의 말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담담했는데, 나는 그 태연함이 오히려 이 만남을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설마 나를 미리 알고 여기 온 건 아니겠지.' 그런 의심을 품으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하게 되물었다. "당신도 이 근처에 볼일이 있었나 봐요." 속으로는 '이 넓은 대륙에서 벌써 두 번째라니, 확률이 이상한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일 때문에." 더 캐물을 틈도 주지 않는 그 화법에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짐꾼 노릇을 하는 처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에 걸린 짐 상자를 잠깐 내려다보았는데, 그 시선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야 할지 몰라 나는 괜히 상자를 고쳐 멨다. 그날 저녁, 상단이 마련한 임시 숙소에서 다른 짐꾼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옆자리에 앉은 나이 든 짐꾼이 국경 근방의 소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즘 이 근방에 제국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더군.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던데." 다른 짐꾼이 맞장구를 쳤다. "황도 쪽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세금이 또 오른다는 소리도 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낮에 본 그 남자를 떠올렸다. '제국에서 파견한 사람이라니, 설마.' 국그릇을 뜨는 손이 잠시 멈췄지만, 나는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식사가 끝난 뒤 여관 안뜰로 나섰다가, 나는 그가 같은 여관 안뜰에 앉아 지도를 펼쳐놓고 있는 모습을 다시 발견했다. 달빛이 지도 위로 비스듬히 떨어져 표식들의 윤곽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는데, 그 지도 위에는 낯선 문양의 표식들이 촘촘히 찍혀 있었고, 그 표식들이 정확히 백린제국 황도로 향하는 길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는 걸 알아본 순간, 나는 그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굳혔다. '저 정도 지도를 가지고 다니는 여행자는 없지. 저건 관리자나 첩자, 혹은 그보다 훨씬 위험한 무언가의 물건이야.' 나는 그와 다시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는데,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 웃음이 왠지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괜히 뒷목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신경 쓰이면 물어봐도 되는데." 그의 말에 나는 결국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옮겨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지도는 그가 손을 얹자마자 반쯤 접혔는데, 그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나는 순간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직설적인 질문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지도를 접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국의 일을 좀 봐주는 사람." 그 대답은 진실을 감춘 것도 아니고 드러낸 것도 아닌, 정확히 그 중간 어딘가에 걸쳐 있는 말이었다. '이런 애매한 대답을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하는 사람은 대체로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더라.' 나는 그 애매함이 오히려 흥미로워서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당신은. 명운국에서 왔다고 했지." 그 물음에 나는 짐꾼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나는 손목을 매만지며 애써 태연한 척을 유지해야 했다. 나는 결국 대충 얼버무렸다. "사정이 있어서 떠났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는데, 그 배려가 오히려 나를 더 궁지에 몰아넣는 것 같아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캐물었으면 오히려 편했을 텐데, 저렇게 순순히 넘어가니까 더 불안하잖아.' 그날 밤 헤어지며 그는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고, 나는 상단을 따라 황도까지 간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아주 잠깐,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옅게 굳는 걸 보았는데, 그 미세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때의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지도를 접던 손끝이 아주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는 사실만은,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눈앞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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