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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국경으로 향하는 길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고, 훨씬 조용했다. 마차 한 대 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는데, 성녀궁에서 지낼 때는 어디를 가든 최소한 시녀 한 명은 붙어 있었고 발이 땅에 닿을 일도 거의 없었으니 이 낙차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걸어서 국경을 넘게 될 줄이야. 성녀 시절엔 마차 바퀴 소리만 들려도 짜증 냈던 내가.' 근위병들은 국경 검문소 앞까지만 나를 압송한 뒤 등을 돌려 돌아갔고, 나는 낡은 회색 로브 하나만 걸친 채로 명운국과 백린제국의 경계를 알리는 이정표 앞에 홀로 남겨졌다. 이정표에 새겨진 글씨는 오래되어 반쯤 지워져 있었고, 그 아래 놓인 돌무더기 위에는 누군가 놓고 간 시든 꽃 한 송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여기까지 걸어서 왔다가 결국 넘지 못하고 돌아갔거나, 아니면 넘고 나서 다시는 못 돌아갔거나. 어느 쪽이든 기분 좋은 상상은 아니었다. '이름도, 지위도, 결계도 없는 서하린이라니, 낯설어서 오히려 웃기네.' 나는 은발을 대충 두건 속에 눌러 넣고 자수색 눈동자가 눈에 띄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는데, 성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명운국의 도망자로 오해받아 곤란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게는 신분을 증명할 도장 하나, 결계를 두를 마력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나는 그냥 국경을 넘으려는 수상한 여자 하나가 될 뿐이었다. 성녀였을 때는 얼굴을 가리는 일이 오히려 낯설었는데, 이제는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더 무서워졌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국경 지대의 검문소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상인들의 짐마차와 용병들의 거친 말투가 뒤섞인 그 풍경 속에서 나는 그저 흔한 여행자 한 명으로 지나가려 애썼다. 짐마차 바퀴가 진창에 빠져 상인이 욕설을 퍼붓는 소리, 용병 무리가 술값을 두고 시비를 붙는 소리, 아이를 업은 여인이 지친 목소리로 순서를 재촉하는 소리. 이 모든 소음 속에 섞여 있으면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얕았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이 통행증, 어디서 받았지." 검문을 서던 병사 하나가 내 통행증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다가 유독 긴 시간을 붙잡아두었다. 그는 통행증의 인장을 손톱으로 긁어보기도 하고, 빛에 비춰 보기도 하면서 미간을 좁혔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심장은 점점 빨라졌다. 나는 지위를 잃은 몸으로 정식 통행증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하며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위조인 거 나도 알아, 근위대장이 대충 급하게 찍어준 거니까. 근데 그걸 지금 여기서 들키면 나는 대체 뭐가 되는 거지.' 도망자로도 모자라 위조 서류범이 되는 시나리오까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그려졌다. "이 통행증, 어디서 받았지." 병사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 일행이오. 문제 있으면 나한테 물으시오." 고개를 돌린 나는 그제야 그 남자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고, 눈매는 조각가가 정성껏 깎아낸 듯 서늘하게 곧았으며, 콧대는 자로 잰 듯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 어느 화가가 그려도 붓끝이 흔들리지 않을 얼굴이었다. 옷차림은 수수했지만 그 안에 감춘 태도에서는 이상하게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는데, 걸음을 옮기는 방식 하나, 턱을 드는 각도 하나에서도 평생을 명령하는 위치에서 살아온 사람의 습관이 은근히 배어 나왔다. '분위기가 꼭 왕궁 경비대장 같은데, 여행자 흉내 내는 게 영 어색하네.' 아무리 수수한 여행자 옷을 걸쳐도 저 눈빛만은 감춰지지 않는구나 싶었다. 병사는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상하게 순순히 통행증을 돌려주었다. 조금 전까지 인장을 긁어보며 의심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는데, 병사는 그 남자를 향해 짧게 목을 숙이는 시늉을 하다가 스스로도 어색한 듯 얼른 자세를 고쳤다. 그 미묘한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병사가 저런 태도를 보일 일반인이 어디 있어. 저 남자, 뭔가 있구나.' 나는 얼떨결에 검문소를 무사히 빠져나온 뒤에야 그에게 물었다. "왜 도와주셨어요."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곤란해 보여서." 그게 다였다. 더 이상의 설명도, 대가를 바라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그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낯설어서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따라 걸으며 곁눈질로 살폈는데, 그가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가 예사롭지 않은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속으로 조용히 경계심을 높였다. 손잡이 끝에 새겨진 문양은 언뜻 흔한 장식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선의 굵기와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해서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 정교한 세공사가 새긴 것이 분명했다. '용병이라면 저런 검은 못 들지. 저건 실전용이 아니라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의 검이야.' 성녀궁 시절 귀족들의 예장검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검들과 결이 비슷했다. "어디까지 가시오." 그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골랐다. 목적지를 정확히 밝히는 것도 위험하고, 아예 없다고 하는 것도 수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냥, 갈 수 있는 만큼요." 내 대답이 좀 한심하게 들렸는지 그는 픽 웃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 여행자가 여기 많소. 다들 갈 곳이 없어서 국경을 넘지."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나만 갈 곳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는 국경 마을의 작은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흙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는 앞서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몇 걸음 간격을 두고 따라갔는데,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다. 낯선 사람과 함께 걷는데 굳이 말을 채우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라니, 성녀궁에서는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거리감이었다. 여관 앞에 도착하자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내게 마른 빵과 물주머니를 하나 건네며 짧게 말했다. "이 길 끝까지 가면 마을이 나오니, 거기서 일자리를 구해보시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며 고맙다는 말을 겨우 짜냈고,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서두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유롭지도 않았다.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의 걸음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는데, 그 확신의 근거를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다만 그가 스쳐 지나가던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아주 미약한 마력의 잔재가 반응하듯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설마 저 사람도 마력을 가진 건가. 아니면 내가 아직도 마력에 민감한 몸이라서 그냥 예민하게 반응한 건가.' 성녀의 힘을 잃었다고 해도 몸에 새겨진 감각까지 한꺼번에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그 생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여관방에 몸을 눕히고도 그 서늘한 눈빛이 자꾸 떠올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삐걱거리는 침대에 몸을 뉘인 채로 나는 마른 빵을 조금 뜯어 먹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국경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았고, 저 남자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하는 물음이 잠들기 직전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병사가 보인 그 이상한 순종, 검 손잡이의 정교한 세공, 그리고 그 무게감 있는 걸음걸이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한 여행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는 그 남자가 백린제국의 황태자 이도현이라는 사실을, 나는 물론이고 그 자신조차 내게 밝힐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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