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기 감사가 있던 날 아침, 나는 결계 보고서를 품에 안고 대전으로 향하면서도 별다른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십 년간 단 한 번도 결계에 균열을 낸 적이 없다는 자부심 같은 게 그때까지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형식적인 통과 절차겠지.' 나는 걸으면서도 보고서 귀퉁이를 손끝으로 매만졌고, 지난 계절 결계 유지에 쏟아부은 마력량을 도표로 정리한 종이가 손에 닿을 때마다 뭔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로 꼼꼼히 준비했는데 트집 잡을 게 뭐가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복도를 지나며 마주친 시녀들은 평소처럼 내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중 한 명이 눈을 피하며 걸음을 빨리하는 걸 나는 그때는 그냥 아침이라 다들 바쁜가 보다 하고 넘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알고 있었으면 귀띔이라도 해주지.' 물론 그런 원망도 나중에야 떠오른 것이지, 그 순간의 나는 그저 대전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십 년 치 성실함을 훈장처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그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대전 한가운데 국왕 폐하가 앉아 계셨고, 그 옆에는 강태민이, 그리고 그보다 한 발 앞에는 미래가 서 있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에서 낯선 반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반지를 본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천환의 고리.' 국왕 폐하께서 오래전 결계용으로 제작하셨다는, 마력을 백 배까지 증폭시킬 수 있다는 그 전설적인 반지가 어째서 미래의 손에 있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보고서를 품에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 귀퉁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대전 안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 평소 정기 감사 때는 서기관들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며 잔기침 소리로 어수선했는데, 오늘은 그 모든 소음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어서, 굳이 서류를 뒤적일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서하린." 강태민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날카로움이 실려 있었다. "그동안 성녀로서의 본분을 소홀히 했다는 민원이 계속 접수되었다."
본분이라니. 결계에 마력을 쏟아붓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에게 상처 치료며 민원 청취까지 다 하라는 건 애초에 사람 하나를 둘로 쪼개서 쓰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지난달만 해도 사흘 밤을 꼬박 새워가며 북쪽 결계벽 보수를 끝냈고, 그러고도 다음 날 아침에는 민원실에 앉아 화상 입은 아이의 손을 치료했다. 그 모든 시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소홀함'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되고 있었다.
나는 항변하려 입을 열었다. "민원이라니, 어떤 민원인지 구체적으로—"
그보다 먼저 미래가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 나섰다. "언니, 미안해. 하지만 백성들이 너무 힘들어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그 떨림이 얼마나 완벽하게 연출된 것인지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눈물까지 준비했다니, 배우로 데뷔해도 성공하겠네.' 심지어 손수건 한 장을 미리 준비해온 듯 손끝에 쥐고 있었는데, 그 손수건에 눈물이 닿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다음 대사로 넘어가고 있었다.
국왕 폐하는 그제야 입을 여셨는데,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최고 성녀의 지위를 서미래에게 이양하고, 서하린의 지위를 박탈한다."
지위 박탈이라는 말이 귀에 꽂히는 순간 대전 전체가 물속처럼 먹먹해졌다. 나는 순간 내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맞는지조차 헷갈렸는데,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십 년을 밟아온 바닥인데, 그 순간만큼은 처음 보는 남의 땅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강태민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혼약도 파기한다." 파기라는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마저 스쳐 지나갔는데, 그걸 본 나는 이 남자가 나와 함께한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나를 사람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했다. 삼 년을 함께 보내면서 그가 내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나 되짚어봤지만, 떠오르는 건 늘 결계 보수 일정과 마력량 보고뿐이었다. '애초에 사람으로 대한 적이 없었으니, 지금 와서 서운할 것도 없나.'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이 꺾일 것 같았지만, 대전 바닥에 무너지는 모습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고, 그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결계는, 그럼 누가 유지합니까." 내가 겨우 짜낸 질문에 미래가 손가락의 반지를 슬쩍 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 반지가 있으니 저도 할 수 있어요."
그 웃음이 얼마나 태연했는지, 나는 그 순간 이 모든 일이 최근에 급하게 짜인 계획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준비된 무대였다는 걸 확신했다. '반지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낄 정도면 준 지 꽤 됐다는 소리네.' 손가락에 꼭 맞는 그 반지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 반지가 만들어지던 날, 국왕 폐하가 직접 감독하며 결계용으로만 쓰겠다 못 박았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저 손가락으로 옮겨간 건지, 그 과정의 어느 한 조각도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판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왕 폐하는 내게 국외 추방을 명하셨고, 그 어떤 짐도 궁의 물건으로 간주해 가지고 나갈 수 없다는 조건이 뒤따랐다. 나는 별채에 두고 온 그림들과 화구가 떠올랐는데, 밤마다 결계 유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그림을 그리며 겨우 버텨왔던 시간들이 고작 이런 식으로 몰수당한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항변할 틈도 없이 근위병 두 명이 다가와 내 양팔을 붙잡았다.
"놓으세요, 제 발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근위병들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를 문 쪽으로 밀었다. 끌려나가는 동안 나는 국왕 폐하와 눈을 맞추려 했지만, 그는 이미 다음 서류로 시선을 옮긴 뒤였다. 그 어떤 작별 인사도, 눈길 한 번도 없었다. 십 년을 폐하를 위해 결계를 지켜왔는데, 마지막 순간 받은 건 서류를 넘기는 손끝의 움직임뿐이었다.
대전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미래가 강태민의 팔을 살짝 잡으며 무언가 귓속말을 하는 걸 보았고, 그 장면이 마치 오래전부터 이 결말을 상상하며 연습해온 사람들의 마지막 리허설처럼 자연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의 어깨가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이, 이제 막 시작하는 연극의 첫 장면처럼 산뜻해 보이기까지 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근위병들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복도 양옆에 늘어선 시녀들과 서기관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중 몇몇은 내가 지나갈 때 옷자락이 스치는 것조차 피하려는 듯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십 년을 같이 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럴 때만 남처럼 구는 것도 재주네.'
그렇게 나는 십 년을 바쳐온 궁을 빈손으로, 그것도 죄인처럼 끌려 나가며 떠났다. 성문 앞에서 근위병들이 팔을 놓아주었을 때, 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발밑의 흙길은 대전의 대리석 바닥과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고, 그 낯선 감촉이 오히려 내가 정말로 궁 밖으로 밀려났다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왕궁의 첨탑 위로 결계의 빛이 여전히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십 년 동안 매일 밤 마력을 쏟아부으며 지켜온 그 빛이었다. 이제는 미래의 손가락에 낀 반지가 대신 그 빛을 먹여 살리겠지.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그 빛이 이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실감으로 다가왔다. 낯선 여관방 천장을 보며 누워 있던 그 밤, 나는 처음으로 내 손끝에서 마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순간 왜인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