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성소 사건 이후로 신전의 시선이 바뀌었다. 성실하지만 성과 없는 아이라는 말은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늙은 신관은 매일 나를 따로 불러 지도했고, 다른 후보들은 더는 뒤에서 웃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거리를 뒀다. 존경과 경계가 섞인 시선으로.
솔직히 말하면 그게 더 불편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건 익숙해서 그냥 무시하면 됐는데, 이건 뭐 마주칠 때마다 다들 목례를 하고 슬쩍 자리를 피하니 사람을 뭐 전염병 걸린 사람처럼 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다인이인데.
그 무렵 나는 신전 뒤편의 정원에서 이상한 존재를 처음 만났다.
정원에는 백화라는 이름을 가진 흰 꽃이 가득 피어 있었는데, 신전의 이름이 거기서 왔다고 들었다. 나는 정화 훈련이 끝나면 종종 그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다른 후보들이 없는 시간, 다들 저녁 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 혼자 앉아 있으면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어느 날, 꽃잎 사이에서 손가락만 한 작은 존재가 튀어나왔다. 하얀 날개를 가진, 사람의 형체를 흐릿하게 닮은 작은 것이었다.
처음엔 그냥 반딧불인가 했다. 근데 반딧불이 말을 걸 리가 없잖아.
"드디어 왔구나, 각성한 아이야."
그 존재가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나는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엉덩이로 바닥을 찍었다. 아팠다. 진짜 아팠다.
"당신…… 누구세요?"
"나는 이 백화 정원의 정령이야. 백 년 넘게 여기 있었는데, 너처럼 진짜 빛을 다루는 아이는 처음 봤어."
정령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신기하다는 듯 나를 관찰했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냄새로 맡는 것처럼, 코끝을 내 어깨에, 머리카락에, 손끝에 대고 킁킁거렸다. 그 모습이 어딘가 우스워서, 나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이름이 있어요?"
"백화라고 불러. 정원 이름이랑 같으니 외우기 쉽잖아."
"그럼 정원이 없어지면 정체성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 무서운 소리를 왜 첫 만남에 하니."
백화는 그 후로 매일 정원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훈련이 끝나면 그곳으로 가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신관이 뭐라고 했는지, 다른 후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저택에서 여전히 답장이 없다는 것까지. 백화는 대부분 시답잖은 말로 받아쳤다.
"오늘은 늙은 신관님이 정화 진법을 세 번 더 그리라고 했어요."
"불쌍한 손목이네."
"그리고 옆방 애가 나 보더니 인사도 안 하고 도망갔어요."
"걔는 원래 겁이 많아. 나비만 봐도 도망가."
"저택에선 아직도 답장이 없어요."
"그건 안 물어봤는데."
가끔은 정확하게 내 마음을 찔렀다.
"넌 왜 자꾸 저택 쪽 얘기를 해?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그냥……."
"그리고 아직도 그 왕자 문쪽 쳐다보는 버릇 못 고쳤지."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니까. 신전 복도를 걸을 때마다 습관처럼 왕궁 방향으로 이어지는 문을 한 번씩 쳐다보는 버릇이, 나도 모르게 몸에 붙어 있었다.
백화는 내 어깨 위에 앉아 작은 손으로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괜찮아. 사람은 원래 다 미련한 짓 하나씩은 붙들고 살아. 나도 백 년째 이 정원 못 떠나잖아."
"그건 좀 다른 것 같은데요."
"뭐가 달라. 미련한 건 다 똑같아."
그 말이 위로였는지 농담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날 처음으로 신전 안에서 진짜 편안함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지 따지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신전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늘 뭔가를 증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성녀 후보답게, 신관의 기대에 맞게, 저택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근데 백화는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정원에 앉아서 시답잖은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게 다였다. 그게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그해 가을, 신전은 대륭국 전역의 오염 지역을 정화하는 임무에 성녀 몇 명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명단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랐다.
명단이 발표되던 날, 강당에 붙은 종이 앞에서 나는 내 이름을 세 번이나 확인했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서. 다인. 분명히 내 이름이었다.
늙은 신관은 나를 불러 짧게 말했다.
"다인아. 이제 너는 신전의 얼굴이 될 것이다."
그 말이 기쁘지 않았다고는 못 하겠다. 마침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감각은, 몇 년간 편지 답장을 기다렸던 마음의 빈자리를 조금은 채워주었으니까. 신관실을 나오면서 나는 혼자 실실 웃었다. 지나가던 다른 후보가 이상하게 쳐다봤는데, 그마저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원으로 달려가서 백화한테 그 소식을 전했다.
"백화, 저 파견 명단에 들어갔어요!"
"오, 축하해."
"근데 왜 그렇게 심드렁해요?"
"심드렁 안 했는데."
"눈에서 다 보이는데요."
백화는 별다른 대답 없이 내 어깨 위를 빙글 돌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그날 밤, 훈련을 마치고 정원에 앉았을 때 백화는 내 어깨 위에서 유난히 조용했다. 평소라면 벌써 세 마디쯤 시답잖은 소리를 했을 텐데, 그날은 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만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니, 그냥……."
백화는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날개가 살짝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뭔가 말할 듯 말 듯한 그 침묵이 평소의 백화답지 않아서 나는 재차 물어보려다가 그만뒀다. 정령도 가끔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겠지, 하고.
"백화도 가끔 비밀이 있나 봐요."
"비밀은 아니고……. 됐어. 신경 쓰지 마."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정령이 원래 변덕스러운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백 년을 산 존재니까, 인간이 이해 못할 감정선이 있을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겼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
며칠 뒤, 신전에 다시 왕궁에서 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돌았다. 이번에는 후원금 전달이 아니라, 정식 초청장이라고 했다. 신관들이 회랑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지나가다 들었다. 발신인 이름이 신관들 사이에서 조용히 오갔다.
"그분이 직접 오신다고요?"
"초청장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군요."
"신전 입장에서는 영광이지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그분. 신관들이 그런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삼 년 만에 다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이헌.
그가 다시 신전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복도 창문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삼 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 얼굴이, 이상하게도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