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여름의 정화 의식은 성녀 후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날이었다.
신전의 지하 성소에 고여 있는 오염된 마력을 정화하는 일. 말은 근사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이거였다. 몇 백 년치 쓰레기를 몸으로 받아내는 청소 당번. 매년 후보 중 몇은 반동으로 몸을 상했고, 운 나쁜 해에는 며칠씩 앓아누웠다. 다들 그 날짜만 다가오면 얼굴이 하얘졌다.
나는 그해 자원했다.
신관은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그 표정이 웃겼다. 아니, 놀랄 것까진 없잖아. 어차피 마력도 없는 애가 위험해봤자 얼마나 위험하겠어, 하는 계산이 신관의 눈동자 위에 그대로 떠 있었으니까. 그는 결국 말리지 않았다.
"확실합니까, 다인 님."
확실하냐고 물으면서 이미 서류에 도장을 찍고 있는 사람 특유의 그 태도.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른 후보들도 순번을 채워야 했고, 나는 순번에서 늘 맨 마지막으로 밀리는 쪽이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손을 들었을 뿐이다.
성소는 지하 깊은 곳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공기가 한 겹씩 무거워졌다. 벽은 검게 얼룩져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오염의 흔적이 응고된 채 남아 있었다. 마치 누가 몇 백 년 동안 여기다 검은 물을 쏟아붓고 한 번도 닦지 않은 것처럼. 냄새도 이상했다. 곰팡이 냄새랑 쇠 냄새랑,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오래된 것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다른 후보 두 명과 함께 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은 세라, 오른쪽은 이름이 기억 안 나는 후보였다. 세라는 들어오면서부터 손을 떨고 있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세라다운 대답이었다. 다정함이라곤 한 줌도 없는데, 그게 또 세라의 매력이었다. 신관이 밖에서 지켜보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 서서 정화 의식문을 외기 시작했다.
처음 얼마간은 평소와 같았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리려 애썼지만 늘 그랬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배 속 어딘가에 스위치가 있는데 그 스위치로 가는 선이 아예 끊어진 느낌. 옆에 있던 후보들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세라의 손끝은 옅은 초록빛, 다른 후보는 은은한 청색. 나만 여전히 어두웠다.
늘 그랬듯이.
세 해 동안 신전에서 지내면서 이 순간을 몇 번이나 마주했는지 모른다. 다들 빛나는데 나만 캄캄한 순간. 처음엔 서러웠고, 다음엔 화가 났고, 이제는 그냥 익숙했다. 익숙해진다는 게 제일 무섭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때 바닥이 흔들렸다.
의식문을 외던 세라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얼룩이 응고돼 있던 바닥 한가운데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마치 물이 끓기 직전처럼, 표면이 울렁거리면서.
오염된 마력이 갑자기 응집하며 검은 형체를 만들어냈다. 처음엔 그냥 검은 웅덩이 같았는데, 순식간에 형태를 갖췄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그저 검은 그 자체가 서 있는 것 같은 모양.
신관이 밖에서 소리쳤지만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문 열어! 문 왜 안 열려요!"
밖에서 문고리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머릿속 한켠으로 든 생각은, 도대체 이 신전은 안전장치를 왜 이렇게 만들었나 하는 거였다. 화재경보기도 없고 비상문도 없고. 이런 안전 규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벌써 폐쇄 조치를 당했을 건물이었다.
다른 두 후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검은 형체는 순식간에 사람 키만큼 커졌고, 그 안에서 뻗어 나온 촉수 같은 것이 가장 앞에 서 있던 후보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라였다. 세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까지 나한테 안 괜찮아 보이냐고 쏘아붙이던 그 입이, 지금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머리로 판단해서 움직인 게 아니라, 다리가 알아서 앞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용기냐, 그냥 반사신경이었다.
촉수가 내 팔을 휘감았다.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뜨거운 게 아니라 차가운데 뜨거운,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통증이었다.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아팠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고통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다희가 반동으로 쓰러졌던 날.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했던 말.
넌 착한 아이니까 다희를 도와줄 수 있지.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나. 다희 방문 앞에 앉아서 밤새 물수건을 갈아주던 나.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왜 항상 나여야 하나, 왜 다희는 아프면 되고 나는 아프면 안 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에게 놀라서 그 생각을 서둘러 지워버렸던 나.
그리고 이헌이 신전 정문을 빠져나가던 마차의 뒷모습.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던 그 뒷모습을, 나는 정문 앞에 서서 오래 바라봤었다. 부르고 싶었는데 부르지 못했다. 부른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 생각이 다리를 붙잡았고, 마차는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든 장면이 한 번에 지나가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팔을 휘감은 촉수가 순식간에 하얗게 타올랐다. 빛이었다. 그동안 내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억눌려 있던 힘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마치 몇 년 동안 잠겨 있던 수도꼭지가 갑자기 터진 것처럼. 성소 전체가 순간적으로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검은 형체는 그 빛에 닿는 순간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세라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 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후보도 입을 벌린 채 얼어 있었다. 나도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 새하얀 것이 내 손끝에서, 내 팔에서,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마치 지금까지 꾹꾹 눌러두고 있던 무언가를 뚜껑째 날려버린 느낌.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성소 바닥에는 검은 얼룩 대신 하얀 재만 남아 있었다. 몇 백 년 묵은 오염이 순식간에 재로 변한 자리. 방금까지 곰팡이와 쇠 냄새로 가득했던 공기에서, 이상하게도 옅은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팔은 여전히 아팠지만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었다. 소매를 걷어보니 피부는 깨끗했다. 방금까지 살이 타는 것 같았는데, 흔적조차 없었다. 옆에 있던 두 후보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인……?"
세라가 겨우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신관이 들어왔다. 문고리를 붙잡고 그렇게 흔들어대던 게 무색하게, 이제야 열리는 문. 그는 성소 안을 둘러보다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선이 나와 하얀 재가 깔린 바닥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다. 나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껴졌다. 지금까지 신전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내 안에, 실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세 해였다. 세 해 동안 나는 매번 어두운 손끝을 확인하며 스스로를 의심했다.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없는 사람인가, 신전에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그 세 해가 이 한 번의 빛으로 뒤집히고 있었다.
"성녀 다인이 오염을 정화했습니다."
밖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위로, 위로 퍼져나가는 게 들렸다. 그 말이 신전 전체로 퍼져 나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끝에서 옅은 금빛이 남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게 세 해 동안 내가 찾아 헤맸던 것이라는 걸, 그리고 이 힘이 앞으로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때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신관의 얼굴에 떠오른 그 표정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방금까지 나를 대충 훑어보던 그 무심한 눈이, 지금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눈빛이, 앞으로 내가 겪을 일들 중 가장 작은 변화일 뿐이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