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명 쓴 학생회장 약혼녀

2화

강도현이 나를 학생회실로 불렀다. "할 얘기가 있어." 메시지는 그 한 줄뿐이었다. 이모티콘도 없고, 물음표도 없고, 그냥 딱 그 여섯 글자. '이렇게 딱딱하게 부르는 건 흔치 않은데.' 평소 도현이 나한테 보내는 메시지는 대충 이랬다. '밥 먹었어?', '이따 회의 몇 시에 하지', '너 오늘 머리 왜 그래 ㅋㅋ'. 시답잖은 잡담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문장 하나에 마침표까지 딱 찍혀 있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지만, 나는 별일 아닐 거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학생회 예산안 때문이겠지. 아니면 다음 주 행사 준비 때문일 수도 있고. 별의별 핑계를 머릿속으로 주워섬기며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학생회실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도현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학생회 임원들 — 부회장 하나, 서기 하나, 회계 담당 하나. 그리고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한소라. '분위기가 왜 이래.' 다들 나를 보는 눈이 이상했다. 반가움도, 짜증도, 무관심도 아니었다. 뭔가를 이미 알고 있는데 티 내지 않으려는, 그런 애매한 표정들. 부회장이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거, 네 거 맞지?" 도현이 책상 위에 낡은 수첩을 올려놓았다. 도서관에서 봤던 그 수첩이었다. 표지가 낡아서 귀퉁이가 살짝 접혀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갈색 수첩. "아니, 내 게 아니야." 나는 즉시 대답했다. '저게 왜 내 거야. 처음 보는 물건이잖아.' 도서관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게 전부였다. 손으로 만진 적도 없는데, 저게 왜 내 것이냐고 물어보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필체가 네 거랑 똑같은데." 도현이 수첩을 펼쳐 보였다. 낯익은 필체가, 확실히 내 필체와 비슷했다.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거의 똑같았다. 'ㅅ'을 쓸 때 살짝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버릇까지, 내가 노트에 필기할 때랑 완전히 같았다. '말도 안 돼. 저걸 어떻게...'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수첩 안에는 일기 형식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날짜별로, 소름 끼치도록 구체적으로. 시간까지 적혀 있었다. 오후 3시 20분, 오후 4시 15분. 마치 누군가 진짜로 그 순간을 겪은 것처럼. 『오늘도 한소라를 화단 뒤로 불러 세웠다. 남작가 양녀라는 게 그렇게 잘난 건지, 그 앞에서 자꾸 웃음이 났다.』 『물을 뿌리는 것도 지겨워졌다. 다음엔 뭘 해볼까.』 『오늘은 계단에서 일부러 부딪혔다. 놀란 얼굴이 볼 만했다.』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없는 일이 사실처럼 쌓여 있었다. 날짜를 세어 보니 거의 한 달 치였다. 한 달 동안 매일같이 한소라를 못살게 굴었다는 기록이, 마치 일기 숙제라도 하듯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나는 이런 짓 한 적 없어.' 속으로 소리치는 것과 실제로 목소리가 나가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입이 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이거 다 내가 쓴 게 아니야." 목소리가 떨렸다. 스스로 듣기에도 자신 없게 들려서 더 답답했다. "그럼 어떻게 네 필체랑 똑같은 걸까?" 도현의 눈빛이 차가웠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나를 이렇게 보는 적은 없었는데. "한소라가 이걸 가지고 있었다고 했어. 며칠 전부터 너한테 뭔가 당하고 있었다고, 무서워서 말도 못 했다고." 구석에 있던 한소라가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말하면 더 심해질까 봐..."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겁에 질린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저 연기 진짜 잘한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냉정하게 판단이 되는 게 웃겼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여유롭게 볼 처지가 아닌데.' 부회장이 한소라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서기는 나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뭘 의미하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필체 감정을 해보자."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이 학원에 필적 감정 마법사가 있잖아, 불러줘." 목소리에 힘을 주려고 애썼다.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증거를 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어느 정도 확인했어. 세 명이나 필체가 비슷하다고 했고." "세 명이 언제 확인을 해? 나는 이 자리에서 처음 이 수첩을 봤는데?" 목소리가 커졌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이거 완전 짜고 치는 판이잖아.'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자리에 나만 뒤늦게 불려온 거였다. 필적 감정이니 뭐니 하는 절차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냥 나를 앉혀놓고 죄를 통보하는 자리였을 뿐. "서연아." 도현이 낮게 불렀다. 그 말투에서, 이미 그가 어떤 결론을 내렸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너한테 실망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실망? 뭐가 실망인데. 증거도 없이 결론을 내려놓고 왜 실망이야.' 하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뭘 말해도 이미 저 표정 앞에서는 소용없을 것 같았다. 부회장이 조용히 나를 쳐다보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제일 무서웠다. 다음 날, 학생회 게시판에 공고문이 붙었다. 『백작가 영애 이서연, 남작가 영애 한소라에 대한 지속적 괴롭힘 정황 발견. 학생회 조사 착수.』 글씨 크기부터 유독 크게 박혀 있었다. 지나가는 애들마다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수군거림, 곁눈질, 그리고 대놓고 나를 향한 손가락질까지. "쟤가 그 얘래?" "백작가 딸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 짓을 하냐." "무섭다, 진짜."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는 애들도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다. '와,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다.' 하루 사이에 학원 전체가 나를 가해자로 확정 지어버렸다. 증거랍시고 내놓은 건 필체가 비슷하다는 수첩 한 권뿐인데, 그걸로 이렇게까지 빠르게 소문이 퍼질 줄은 몰랐다. 강당에서 마주친 도현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당분간 학생회 임원직에서 물러나 줘." 짧고 명확한 명령이었다. 반박할 시간도, 여지도 주지 않았다. "도현아, 나 진짜 아니야. 내 말 좀..."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이게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이야?'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증거는 없고, 소문은 이미 진실이 되어버렸다. 억울함을 호소할 자리조차 남지 않았다.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한소라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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