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정령님, 제 스승 해주실래요?

4화

핥짝! 놈의 이빨이 내 팔뚝을 스치듯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몸을 틀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저 자식, 미슐랭 별점 심사하듯 나를 한 입씩 맛보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게 스스로 놀라웠다. 촤악! 다시 상처가 생겼다. 이번엔 팔뚝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두려움은 이럴 때 시간을 늘리는 이상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평소엔 출근 시간 오 분이 그렇게 안 늘어나던데, 죽기 직전엔 무슨 프리미어 프로 슬로우 효과라도 걸리는 건지. 나는 뒤로 굴러 거리를 벌리려 했다. 바닥에 등이 긁히는 감각, 흙과 낙엽이 상처에 파고드는 느낌이 생생했다. 하지만 놈의 반사 신경은 인간의 기준으로 재면 안 되는 물건이었다. 내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놈은 이미 내 앞에 다시 서 있었다. 마치 배달앱 라이더가 도착 예정 시간을 무시하고 삼 분 만에 초인종을 누르는 수준의 부조리함이었다. 아니, 이 상황에 배달 얘기가 왜 나와. 정신 차려라, 나. [시편 22:16, 개들이 나를 두르고 악한 무리가 나를 포위하였나이다] 포위라기엔 상대가 한 마리뿐인데, 왜 사방에서 압박받는 기분이지. 아마 이게 절대적인 힘의 차이라는 걸 몸으로 배우는 순간인가보다.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과목이었다. 있었다면 나는 전교 꼴찌였을 거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의미 없는 몸부림이라는 걸 알면서도, 뭔가라도 해야 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하는 최후의 발악이라는 게 이렇게 초라하구나. 영화에서는 다들 멋있게 반격하던데, 실제로는 팔이 후들거려서 검조차 제대로 못 잡겠다. 놈은 여유롭게 검을 피하며 앞발로 내 손목을 후려쳤다. 딱! 손목에서 뭔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챙그랑, 하는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손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채 축 늘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아프다는 감각조차 뒤늦게 따라왔다. 이게 죽는 건가. 생각보다 별거 없이 진행되는구나. 드라마에서는 죽기 전에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던데,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안 떠오르고 그냥 통장 잔액 걱정만 났다. 이 상황에 잔액 걱정을 하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 소시민적인 인간이구나. 놈이 다시 자세를 낮췄다.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라는 걸, 그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눈빛, 마치 폐업 정리 세일 마지막 날의 사장님 눈빛 같았다. "이제 정말 끝입니다, 손님"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나는 부러진 손목을 부여잡고 뒤로 몸을 던졌다. 등이 다시 나무에 부딪혔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숲의 어둠이 나를 완전히 삼켜버린 것 같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나무껍질의 거친 감촉이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죽음 앞에서는 감각이 오히려 날카로워지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곧 죽을 놈이라 마지막으로 세상을 느껴보려는 몸의 발악인지도. [욥기 41:33, 땅 위에는 그것과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이 없게 지음을 받았느니라] 두려움이 없게 지음 받은 건 저놈이고, 나는 두려움 그 자체로 뒤덮여 있었다. 성경에도 이렇게 편애가 심하다니, 하늘의 인사고과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놈이 도약했다. 은빛 그림자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별별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다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런 텅 빈 느낌. 그 순간, 목에 걸려 있던 별빛목걸이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뜨겁다기보다는, 뭔가 진동하는 느낌. 지지지지직... 목걸이 표면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왜 지금. 평소엔 장식품인 척 조용히 있던 놈이, 하필 이 타이밍에 존재감을 뽐내다니. 연출이라면 타이밍 하나는 최고급이다. [전도서 8:5, 명령을 지키는 자는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리라] 명령이라니, 나는 아무 명령도 안 내렸는데. 설명서 한 장도 안 주고 갑자기 작동하는 이 목걸이는 대체 어느 회사 제품인지 궁금해졌다. A/S 센터라도 있으면 당장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놈의 발톱이 내 목전까지 다가왔다. 찰나의 순간,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강렬하게 터졌다. 번쩍! 시야가 완전히 하얗게 물들었다. 놈의 발톱 소리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 같았다. 뭐지, 방금 뭐가 일어난 거지. 내 심장 소리만 유독 크게 귀에 울렸다. 쿵, 쿵, 쿵. 살아있다는 증거인지, 아니면 죽음의 마지막 신호인지 구분이 안 됐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은빛늑대는 그대로 공중에 멈춰선 채 굳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발톱 끝의 물기까지, 방금 튕겨나간 흙먼지 한 알까지 모조리 정지해 있었다. 포토샵으로 정지 프레임을 잡아놓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낡은 목걸이가 있던 자리에서 뭔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체가 뚜렷하지 않은, 사람 모양 비슷한 빛의 잔영. 그것이 천천히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방금까지 죽음의 위기였는데, 이제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게 뭐지. 귀신인가, 아니면 마수의 새로운 형태인가. 심장이 다시 다른 이유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공포와는 결이 다른, 미지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원초적인 오싹함이었다. 형체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긴 머리카락, 온화한 듯한 얼굴선, 그리고 은은하게 빛나는 눈동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애매한, 무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존재였다. 피부는 마치 유리 세공품처럼 투명하면서도 은은한 빛을 품고 있었고, 옷이라기보다는 빛의 결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형태의 무언가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걸 보고 뭐라고 해야 하나, 인터넷에서 흔히 말하는 "빛의 요정" 같은 존재였다. 다만 그 눈빛만큼은 요정이라기엔 너무 무겁고 깊었다. 그 존재가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Tae-eul..." 그것 말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의 파편들이 이어졌다. TOL-EUM-SI-YA... GWAN-JI-HA-RA... 뭔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외국어 능력시험 만점자를 데려와도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발음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에 흐르던 식은땀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마치 오랜만에 듣는 자장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이상한 감각. 존재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서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누군가를 만난 것처럼, 그 눈빛에는 반가움과 애틋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누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절한 눈빛이었다. 나는 저런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전 여자친구도, 부모님도, 심지어 우리 집 강아지도 저런 눈으로 나를 본 적이 없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건 그런 거창한 상황이 아닌데, 이 존재의 등장이 어쩐지 그 정도 무게로 느껴졌다. 성경 구절을 갖다 붙이는 게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건지, 아니면 진짜로 뭔가 신성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나조차 헷갈렸다. "너, 누구..."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존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조금 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Tae-eul... hamkke..." 함께? 그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였다. 하지만 도대체 뭐랑 함께 한다는 건지, 그게 문제였다. 설마 헬스장 PT 세션 등록하듯 "함께 운동하실까요?" 이런 뜻은 아닐 테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지만, 진짜로 그런 생각이 났다.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은 생각보다 별걸 다 떠올리는 존재인가보다. 은빛늑대는 여전히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놈의 발톱은 내 목전에서 정지한 채였다. 이 기묘한 정지 상태가 얼마나 갈지,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저 발톱이 다시 움직이는 순간 내 목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이 무슨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놓은 게임 화면 같기도 했다. 다만 이건 리셋 버튼도 없고, 세이브 포인트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존재의 손이 천천히 내 가슴에 닿았다. 닿는 순간, 뭔가 뜨거운 것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심장 근처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마치 뜨거운 차 한 잔을 원샷한 것처럼, 속에서부터 뭔가가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낯선 풍경, 낯선 얼굴, 낯선 언어로 나누는 대화들.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억들인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거지. 뭐지, 이거. 설마. 이게 계약이라는 거였다면, 나는 지금 뭘 계약하고 있는 거지. 저 은빛늑대는 언제 다시 움직이는 거지. 그리고 이 존재는,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몸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에 닿은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정말로 뭔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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