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탐라국의 가을은 바람으로 먼저 온다. 섬을 둘러싼 검은 바위마다 파도가 부서지고, 뭍사람들은 그 바람에 붉은 실을 매달아 죽은 이의 넋을 돌려보낸다는 오래된 풍습을 지켜왔는데, 그 풍습이 지금도 이어지는 까닭은 이 섬이 본디 뭍과 멀리 떨어져 스스로 죽음과 삶을 다스려야 했던 땅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실은 마을마다 처마 끝에, 나무 가지에, 심지어 배의 돛대에까지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거렸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산 자와 죽은 자가 아직 이 섬 안에서 서로를 붙잡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왕궁 깊은 곳, 바다가 보이는 낡은 탑 하나에는 그런 풍습도, 바람도 닿지 않는 정적만이 십오 년째 쌓여 있었다. 그 탑에는 붉은 실 한 조각조차 걸린 적이 없었다. 그 탑에 갇힌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탐라국의 공주 이서연이었다.
이서연이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탑의 문은 그녀를 위해 열린 적이 거의 없었다. 병약하다는 이유였는데, 실은 병약함보다는 그녀의 눈—진한 금빛 머리 아래 자리한 청록빛 눈동자가 빛에 따라 무지개처럼 어른거린다는 소문이 왕실을 불안하게 만든 진짜 이유였다. 상서롭지 못한 눈을 가진 공주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 예법이라 했고, 그 예법은 곧 감금이 되었으며, 감금은 곧 침묵이 되었다. 어린 시절 이서연은 그 눈을 가리기 위해 얇은 천을 덧대어 두르고 다녀야 했는데, 시녀들은 그 천을 두를 때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마치 그 눈을 오래 들여다보면 저주가 옮는다는 듯이. 그때마다 이서연은 묻지 않았다. 왜냐고, 언제까지냐고. 물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아주 어릴 때 배웠다.
그러나 이서연은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자랐다. 다른 아이들이 뛰어놀며 배우는 것들을 그녀는 책과 사신의 보고서, 시녀 다은이 몰래 들여오는 소문으로 대신 익혔는데, 그것이 열다섯 살의 그녀를 다른 어떤 왕족보다도 냉철한 계산가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탑 밖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은은 이서연보다 두 살 위였고, 어릴 적부터 탑을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명을 받은 시녀였을 뿐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녀는 이서연에게 유일한 창구가 되었다. 바깥세상의 소식을 물어오는 것도, 왕이 오늘 어떤 표정으로 조회에 나섰는지를 전해주는 것도 모두 다은의 몫이었다. 이서연은 그 정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조합했다. 마치 흩어진 실을 모아 천을 짜듯이.
그날 밤, 이서연은 촛불 하나만 밝혀 놓은 책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 바람이 탑의 돌벽을 훑고 지나가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고,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며칠 전 시녀 다은이 가져온 서방 쌍인제국의 구혼장을 다시 펼쳤다. 구혼장의 종이는 두껍고 매끈했으며, 가장자리에는 낯선 문양이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황제 유겸. 전쟁광이자 혈욕의 악귀라 불리는 자의 이름이 종이 위에 딱딱하게 박혀 있었는데, 이서연은 그 이름을 손끝으로 짚으며 어쩐지 웃음이 났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이름이 자신에게는 문을 여는 열쇠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은이 몰래 주워들은 소문에 따르면, 유겸은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손수 베고 그 피로 손을 씻는다고 했다. 또 다른 소문은 그가 자신의 형제들을 왕좌를 위해 하나씩 제거했다고 전했다. 그런 자가 어째서 탐라국의, 그것도 상서롭지 못한 눈을 가졌다는 공주에게 구혼장을 보냈는지 궁 안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억측을 내놓았지만, 이서연은 그런 억측에 관심이 없었다. 소문이 얼마나 진실인지보다, 그 소문이 만들어 낸 두려움이 얼마나 유용한지가 그녀에게는 더 중요했다.
"정말로 답장을 쓰실 겁니까." 다은이 낮은 목소리로 물으며 촛불 심지를 매만졌다. 그 물음에는 걱정이 짙게 배어 있었는데, 이서연은 붓을 든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담담히 답했다. "쓰지 않으면 이 탑 문은 앞으로도 열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 이서연이 되물었다. 그 말에는 방어도 도발도 아닌, 오래전부터 답을 정해 둔 자의 무심함이 있었다. 다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혈욕의 악귀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에게 시집을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혈욕의 악귀보다 이 탑이 더 무섭지." 이서연이 짧게 답하며 붓끝에 먹을 다시 묻혔다. 그 대답에 다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영웅이 갇힌 공주를 구해낸다. 어릴 적 다은이 읽어주던 동화 속 문장이었는데, 이서연은 그 동화를 믿은 적이 없었다. 다만 그 동화의 구조를 믿었다. 갇힌 공주가 있고, 구출하는 영웅이 있어야 한다는 세상의 기대—그 기대야말로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전쟁광이라 불리는 황제가 그녀를 원한다면, 그녀는 그 원함을 도구로 삼아 스스로 탑을 나서면 될 일이었다. 사랑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오직 문이 열리는 순간뿐이었다. 그녀는 문득 어릴 적,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빗물을 받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녀는 자유를 갈망했으나, 갈망만으로는 아무것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갈망은 계획이 되어야 했고, 계획은 도구를 필요로 했다. 유겸이라는 이름은 그 도구였다.
붓끝이 종이에 닿았다. 이서연은 한 글자 한 글자를 눌러 쓰며, 이 짧은 문장이 자신의 십오 년을 끝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로 끝날까. 그러나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붓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고,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그림자도 벽 위에서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마지막 문장에 서명을 마치고, 인장을 눌러 봉했다. 인장이 종이 위에 남긴 붉은 자국이 마치 오늘 밤 그녀가 태운 다리처럼 보였다. "이걸 오늘 밤 안에 사신에게 전해." 그녀가 봉인된 서신을 다은에게 건네며 말하자, 다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주님, 후회하시면 그때는 늦습니다." 다은이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말했지만, 이서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다은이 방을 나서기 전, 잠시 문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서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 끄덕임에는 확신도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으나, 다은은 그것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봉인된 서신을 품 안에 소중히 감추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날 밤, 탑의 창문 아래로 작은 인영 하나가 빠져나가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은은 어둠 속을 가로질러 항구로 향했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신에게 서신을 건넸다. 사신은 별다른 말없이 서신을 받아 배에 올랐고, 그 배는 곧 검은 바다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편지는 바닷길을 따라 국경을 넘었고, 그 순간 이서연은 자신이 무엇을 풀어놓았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탑의 창가에 홀로 남은 그녀는 멀어지는 배의 등불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유로 향하는 첫걸음이었으나, 동시에 십오 년 동안 그녀를 가두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를 향해 던진 미끼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