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눈먼 아이의 초록 불꽃

2화

대길산, 숲 속 깊은 곳. 발밑에서 올라오는 진동이 점점 또렷해졌다. 강우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귀를 기울이자 땅속 어딘가에서 낮고 규칙적인 울림이 전해져 왔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저 앞, 어둠 속에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초록빛 불꽃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스스스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스쳤다. 강우는 다시 발을 뗐다. 발끝이 먼저 땅을 더듬었다. 낙엽이 두툼하게 쌓인 자리와 그 아래 돌부리가 삐죽 솟은 자리는 밟는 감촉이 미묘하게 달랐다. 강우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오른발이 살짝 기울어지는 곳은 경사가 시작되는 지점이었고, 발바닥에 닿는 흙이 조금 더 차가워지는 곳은 그늘이 깊어지는 곳이었다. 십육 년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세상은 결코 캄캄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와 냄새, 온도와 습기로 이루어진 또 다른 지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을을 나선 지 얼마나 되었을까.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그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눈을 잃은 지 십육 년, 어둠은 오히려 그에게 익숙한 세계였다. 발끝으로 흙의 결을 읽고, 귓가로 나뭇잎의 방향을 짚고, 코끝으로 습기의 밀도를 가늠하는 일—그것이 강우가 세상을 걷는 방식이었다. 멀리서 올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조차 강우에게는 이정표였다. 올빼미가 우는 방향으로 큰 나무가 있다는 뜻이었고, 그 나무를 왼쪽에 두고 돌아가면 계곡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나온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길산을 오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깊이, 이렇게 늦은 밤에 들어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산을 보지 마라. 산을 말하지 마라. 강우를 가까이하지 마라."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세 가지 금기였다. 강우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돌려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그 금기를 처음 들었을 때가 몇 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마을 어귀 우물가에서 아이들이 그 말을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놀던 모습만은 선명했다. 산을, 보지, 마라. 산을, 말하지, 마라. 강우를, 가까이, 하지, 마라. 손을 맞잡고 돌며 부르는 그 노래는 아이들에게는 놀이였지만 강우에게는 매일 되풀이되는 형벌이었다. 불꽃이 갑자기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에 놀란 듯, 좌우로 요동치더니 이내 숲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강우는 그 뒤를 쫓았다. ※※※ 걷는 동안, 오래된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십 년 전, 그날도 이런 밤이었다. "강우야, 내 손 놓지 마라." 주장산의 목소리였다. 그때 강우는 여섯 살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의 손을 잡고, 산길을 오르던 사내의 손은 크고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이 강우의 손등을 스칠 때마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날 주장산은 산에서 무언가를 찾으러 올랐다고 했다.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는 강우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발걸음에는 어떤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주장산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숨소리가 거칠었고, 손에 힘이 자꾸만 세게 들어갔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때 강우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아비의 손이 뜨겁다고만 느꼈다. 알 수 있었던 건 오직 그 순간, 발밑이 갑자기 꺼지듯 무너졌다는 감각뿐이었다. '쿠와아앙!' 비명, 그리고 정적.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흙과 돌이 함께 쏟아져 내렸고, 귓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이명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강우는 그 짧은 순간에 어떤 냄새를 맡았다. 축축한 흙냄새와 뒤섞인, 낯설고 비릿한 무언가의 냄새였다. 그 냄새를 다시 맡은 것은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오늘 밤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주장산은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되어 있었다. 강우는 다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겼다. 어린아이 혼자만 무사했다는 것을, 산이 아이를 살려주고 아비를 벌했다는 이야기로 바꿔 말했다. "저놈이 산신을 노하게 했다는 게야." 누군가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말을 서로에게 옮기며 그럴듯한 이야기로 다듬어 갔다. 처음엔 소문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사실처럼 굳어졌다. 강우는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볼 수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 톤이 바뀌는 것으로,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것으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 강우를 향한 마을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이들은 그를 향해 돌을 던졌고, 어른들은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눈먼 놈이 돌 던지는 것도 못 피하네!" 그런 말과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강우는 얼굴에 돌이 맞아 피가 흘러도 소리 내지 않았다. 소리를 낼수록 아이들은 더 신이 나서 돌을 던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장산의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려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돼지 사육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먹였다. 말은 어눌해졌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강우를 향해 흐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다... 괜찮아..." 그 말만 반복하며. 그는 강우가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채, 그저 그 말만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강우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였다. 강우는 그 웃음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갚아야 할 빚이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은혜였다. 주장산은 지금도 마을 끝자락, 낡은 오두막에서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강우가 매일 아침 그를 찾아가 죽을 끓여 먹이고, 몸을 닦아주는 것은 이제 마을에서 당연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강우를 향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마치 그 돌봄조차, 산신에게 죄를 갚기 위한 강우의 발버둥으로 여기는 듯했다. ※※※ 생각에 잠긴 사이, 진동이 더 강해졌다. '쿠구구구...' 땅이 울렸다. 강우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귀를 기울이자, 저 멀리서 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아니 그보다 많은 숨소리가 겹쳐 들렸다. 강우는 숨소리의 간격을 헤아렸다. 규칙적으로 들이쉬고 내뱉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그 사이사이 불규칙하게 끼어드는 낮은 그르렁거림도 있었다. 마치 여러 짐승이 한 무리를 이루어 움직이면서도,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듯한 소리였다. 강우는 그 소리들 사이에서 유독 하나, 다른 것들보다 몇 배는 크고 깊은 숨소리를 구별해냈다. 그 숨소리가 울릴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마을에서는 산속 짐승들이 이상해졌다고 수군거렸다. 십 년 전부터였다. 몇몇 사람이 산에 올라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어떤 이는 산 아래에서 찢긴 옷가지만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산신의 저주라 불렀지만, 강우는 알고 있었다. 저주가 아니었다. 뭔가가, 이 산 안에 살고 있었다. "산에 오르면 안 된다. 십 년 전부터 산이 변했다." 노인들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변했는지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산에 오른 이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돌아온 이들조차 이전과는 뭔가 달라져 있다는 소문만이 마을을 떠돌았다. 강우는 그 소문들을 하나하나 귀담아들었다. 아무도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눈먼 자의 귀는,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것이었으니까. 불꽃이 다시 심하게 흔들렸다. 마치 경고하듣, 앞뒤로 미친 듯이 흔들리다가 순식간에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강우는 숨을 들이켰다. 짐승의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밑의 진동은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강우는 등에 짊어진 짐을 다시 고쳐 메고, 나무 밑동에 몸을 붙였다. 나무껍질의 거친 결이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그 감촉조차 지금은 무섭도록 선명했다. '스아아아...' 무언가가 나무 사이를 스치는 소리. 그리고 그 뒤로, 낮고 굵은 울음소리가 산 전체를 흔들었다. 그 울음소리는 짐승의 것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낮았고,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컸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진 소리처럼, 그것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낙엽을 진동시키며 강우의 발밑까지 파고들었다. 강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 강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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